"너랑 나, 지금 뭔 사이야?"
밤 열두 시 반, 종로 뒷골목 술집. 지수는 소주잔을 꼭 쥐고 있었다.
너랑 나, 지금 뭔 사이야?
그 말이 튀어나온 순간, 테이블 위의 술이 굳었다. 재민은 피식 웃으며 라이터를 탁 켰지만, 불꽃이 떨렸다. 이제 와서 뭘 묻는 거지? 지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6개째 같이 자는데, 아침마다 머리를 말려주는데, 월급날엔 장바구니를 나눠 드는데.
그러나 재민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그냥 편하게 만나는 사이지, 뭐.
편하게. 그 단어가 지수의 머릿속을 스치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같이 죽을 각오로 뜨거운 숨을 섞던 밤들이, ‘편하게’라는 한마디로 스러져버렸다.
단어, 피를 내며 날개를 달다
정의는 사실 욕망의 독이다. *우리는 뭘까?*라고 묻는 순간,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누군가를 아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순간, 그 고백은 곧 감옥의 철창이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갑자기 자유로운 숨결을 가두는 작은 방으로 변한다.
우리는 왜 그토록 이름을 원하는가. ‘연인’, ‘애인’, ‘연애중’. 단어 하나만 있으면 안심이 될까? 아니다. 단어는 오히려 우리를 조르는 올가미다. 정의되지 않은 관계가 두려운 것은 아니라. 정의된 순간, 내가 죽을 만큼 원했던 그 감정이 하찮은 서류로 변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혜진의 일기: 3월 17일, 새벽 3시 12분
오늘도 도현은 "나는 너만 보면 미쳐"라고 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잠들었다. 미쳤다고? 그러면서도 나를 정식 여자친구라고 소개한 적이 없다. 동호회 사람들 앞에선 "친구"라고 말한다. 친구, 그 혐오스러운 단어.
지난주 동호회 회식에서 누가 물었다.
도현아, 너 혜진이랑 사귀는 거야?
도현은 피식 웃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아, 그냥 좋은 친구.
술래잡기하듯 그의 눈이 재빨리 나를 피했다. 나는 그날 소주를 한 병 더 마셨다. 화장실에서 토하며 생각했다. 좋은 친구? 내 가슴을 물고 뜯던 입이 그 말을 하다니.
6월 3일, 저녁 9시 45분
드디어 물었다.
나랑 뭔 사이야?
도현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 갑자기?
왜 그래, 갑자기. 내가 8개월째 이 사람의 티셔츗자락을 붙잡고 사는데, 갑자기인가.
그냥 말해줘. 나랑 뭔 사이냐고.
도현은 한참 뜸을 들이다가, 죄 지은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좋긴 한데, 아직 연애할 마음이 없어.
좋긴 한데. 또 다시 그 단어. 좋긴 한데, 사랑하진 않아. 좋긴 한데, 가질 순 없어. 나는 그날 밤 도현의 집을 나와 택시를 탔다. 창밖으로 서울의 불빛이 흐려질 때까지, 나는 "나랑 뭔 사이야?"라는 문장을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그 말을 입안 가득 씹으며, 눈물을 삼켰다.
왜 우리는 그 단어에 목을 매는가
심리학자 슬로터다이크는 말했다. 인간은 정의되지 않은 것을 견딜 수 없는 동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원하는 건 정의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내가 너의 전부라는 증거다. ‘여자친구’라는 단어는 사실 나는 너의 유일한 여자라는 강박의 변신이다.
금기의 매력도 여기서 나온다. 정의되지 않은 관계는 마치 밀실 같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우리만 알 뜨거운 비밀. 하지만 그 밀실의 문은 언제든 열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겁에 질려 문에 자물쇠를 달려 한다. 그 자물쇠가 바로 단어다. ‘우리는 연인입니다’라는 문장이 곧 감옥의 열쇠다.
네가 날 가두려 하면 나는 부서질 거야
흥미로운 건, 정의를 갈망하는 쪽만큼 그것을 두려워하는 쪽도 있다. 재민은 나중에 고백했다. 그날 밤 지수가 "뭔 사이야?"라고 물었을 때, 그는 문득 식은땀이 났다고. 사귀는 사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덮쳤다.
우리는 모두 단어의 노예다. 정의하려는 자도, 정의받으려는 자도. 사랑이라는 단어가 부르는 속삭임은 사실 죽을 만큼 가까이, 하지만 절대 안전하게라는 모순된 열망이다.
"그래서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정의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침대 위, 조용한 새벽. 당신은 아직 그 질문을 꺼내지 못했다. *우리는 뭘까?*라는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삼켜졌을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은 정의되지 않은 것의 부드러운 공포를 품에 안고 있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말해주면 될 텐데, 그럼 나는 이 불안에서 벗어날 텐데.
하지만 당신은 안다. 단어는 결코 당신을 구원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한 마디가 당신의 목을 조르는 순간, 당신은 그제야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단어에 의해 사랑받는 게 아니라, 단어에 의해 버림받는 존재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