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혼자 너무 아픈 거 아니냐?”
준혁은 마지막 문자에 이모티콘 하나 달지 않았다. 그날 밤, 유진은 침대 끝에 쪼그려 앉아 스피커를 틀었다. 작은 방이 통째로 떨려도 그는 듣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볼륨을 올렸다. 음악이 끊기면 자기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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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가슴에 못을 박았다
왜 내가 더 큰 죄인이 되어야 해?
준혁은 서른이 넘어서도 캠핑용품이 늘어나는 것만으로 삶이 풍요로워졌다고 말했다. 유진은 그가 빈 자리를 만들기 위해 쓴 ‘정리의 기술’을 따라 하다가, 결국 자기 전부를 내려놓고 말았다. 남자는 떠나는 이유를 기술하지만, 여자는 남겨진 이유를 되쇠한다. 그 차이가 피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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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을 파먹는 그리움
송미영, 29세, 인사팀. 지난해 여름, 4년 연애를 접었다. 헤어진 지 200일이 넘었는데도 그녀는 밤마다 옛날 채팅방을 들락거린다. 네이버 클라우드에 백업된 사진 3,812장. ‘이건 꼭 지워야지’ 하면서도 한 장씩 눈에 띄는 게 없나 들여다본다. 그녀는 이를 디지털 절단이라 부른다. 한 장만 보면 이불이 축축해진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또 확인한다.
어느 날 선배가 취객들 사이로 끼워준 술 한 잔을 마시던 중, 미영은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그날도 전날처럼 기억은 켜켜이 쌓여가지만, 실제로 남은 건 냉장고에 반만 남은 맥주 두 캔이 전부였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해?” 선배의 질문에 그녀는 미소 지었다. 왜냐고? 내가 먼저 나간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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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욕 뒤에서 숨죽이는 공포
이수진, 33세, 마케팅 대리. 남자친구 재민은 해외 출장 나간 사이, 연락을 끊었다. 다이렉트 메시지는 읽씹. 전화는 꺼짐. 수진은 그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열쇠를 돌리기 전 손에 든 가방에 있던 재민의 양말 한 켤레를 꺼내 맡았다. 아직 땀 냄새가 남아 있었다. 그 찰나, 그녀는 자기가 사냥꾼이 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약자는 없다. 다만 먹히지 못한 육식자가 있을 뿐.
자정이 지나, 수진은 택시를 잡아타고 한강변 모텔로 향했다. 예전 재민이 자주 데려가던 곳. 안내 데스크 아저씨는 눈 한 번 깜짝 않고 302호 키를 건넸다. 문을 닫자마자 침대 위에 뒤집어졌다. 베개에 묻은 머리카락 하나를 빼내어 손톱으로 찢었다. 저건 내가 아니야. 그러면서도 몸이 달아올랐다. 누군가가 재민과 누워 있던 흔적에 자기를 덧입혔다. 오르가즘보다 먼저 찾아온 건 눈먼 질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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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여자만 이토록 가시밭길을 걷는가
남자가 떠날 때는 끝에 대한 확신을 가져간다. 여자는 확신이 아니라,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고 남는다. 그 미세한 온도 차가 상처를 곪게 한다. 여성은 관계를 ‘공유된 추억’으로 저장하지만, 남성은 ‘환승 가능한 경험치’로 전환한다. 그래서 여자는 뒤늦게 가슴에 화살이 꽂혀 있음을 깨닫는다 — 화살은 이미 남자가 뽑아 가지고 갔다.
게다가 사회는 여자에게 ‘정리’를 요구한다. 네가 먼저 남아서 울면 불쌍하다가도, 네가 먼저 새 남자를 만나면 냉정하다고 손가락질한다. 금기의 늪 속에서 여자는 집착이라는 이름의 발톱으로 긁적이며 살아간다. 그리고 문득, 연애는 언제나 자기 선례 없는 전쟁터였음을 깨닫는다. 누군가는 전리품을 챙기고 떠나고, 누군가는 칼날에 남아 움직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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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심장은 어느 쪽인가
아직도, 그가 떠난 자리에 서서 혹시나 그가 돌아올까 망설이는 건 너인가? 아니면, 그가 떠난 자리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데 지울 수 없는 불씨가 너인가?
이 물음은 남자에게조차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답은 오직 당신만이 안다. 깊은 밤, 누군가의 숨소리를 메아리 삼아 잠들 때, 당신의 몸은 아직도 누군가의 무게를 간직하고 있다. 그 무게가 남자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여자의 사지일 수도, 혹은 여자가 지운 줄 알았던 남자의 발자국일 수도 있다. 그래서 묻는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가슴에 남은 것은 상처인가, 유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