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14분. 휴대폰 시계가 바뀌는 순간, 민지가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그냥 맥주 한 잔만 더 마실까?"
그녀의 목소리는 맥주 잔 얼음이 녹는 소리처럼 조용했다. 나는 아직 그녀의 거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TV는 꺼진 지 오래고, 조명은 스탠드 하나만 남겨 두고 있었다. 그 빛 아래서 민지의 얼굴은 반쪽 그림자, 반쪽 은빛으로 갈라져 있었다.
우리는 두 시간 전부터 아무 말이나 주고받았다. 회사 잔소리, 전 남자친구의 결혼 소식, 낮에 봤던 고양이 영상까지. 그러다 말이 끊겼다. 그 정적이 너무 완벽해서 누구도 먼저 깨트릴 수 없었다. 민지는 그 정적 속에서 천천히 맥주를 홀짝였고, 나는 천장의 틈새를 바라보았다. 아주 사소한 균열이었는데, 왜 그걸 지금 봤을까.
"맥주... 있긴 한데."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슬슬 나왔다. 병 2개, 캔 3개가 남아 있었다. 나는 캔 두 개를 꺼냈지만 손이 떨려서 탭을 딱 딱 두 번은 헛손질했다. 그녀가 웃으며 내밀던 오프너를 받아 캔을 따는 동안, 우리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 너는 그래도 괜찮겠지?
― 뭐가?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 사이 2초, 아마도 3초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도 우리는 수백 번의 대답을 주고받았다. ‘이건 아니야’ ‘이건 괜찮아’ ‘우리는 친구니까’ ‘친구라서 문제잖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나는 캔을 입에 댔다. 차가운 액체가 목끝까지 내려갔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가, 다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조명이 그녀의 눈썹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그림자 끝이 내 무릎 위에 닿았다. 나는 그림자마저도 건드리지 않으려고 발가락을 움츠렸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너, 손목이 아직 아프냐?"
"어? 아, 거의 나았어."
"그럼 이제 컵을 들 수 있겠네."
그녀는 내 왼손을 가볍게 건드렸다. 피부와 피부가 닿는 바람에, 나는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아주 짧은 접촉이었지만, 그 여운이 손등을 타고 팔뚝으로, 팔뚝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왔다. 나는 캔을 내려놓고, 손등을 문질렀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처럼.
"민지야."
"응?"
"우리... 여기서 자면 안 될까?"
나는 그 말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말은 공기 속에 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곧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친구에게만 지어주는, 아주 편안한 미소였다.
"그래. 나는 괜찮아. 너는 괜찮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괜찮은 것인지, 괜찮지 않은 것인지조차도. 우리는 각자 이불 하나를 덮고 누웠다. 그녀는 소파, 나는 바닥. 거리는 1미터 남짓이었지만, 그 1미터는 낮에 있던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불을 끄자 방 안은 새카맣게 변했다. 내가 눈을 감으면 그녀의 숨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천천히, 규칙적으로, 그리고 너무 가까이. 나는 팔을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들었다. 손끝이 공기를 가르며, 그녀 쪽으로 10cm씩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그러나 끝내 나는 손을 뻗지 못했다.
왜냐고? 그건 아마도 다음 날 아침에도 우리는 같은 회사에 출근해야 하고, 같은 팀 회의를 해야 하고, 서로를 ‘동료’라 부르며 웃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혹은, 내가 지금 뻗은 손이 그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우리는 정당한 관계를 지키려고 했으니까.
새벽 4시 7분. 민지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나는 아직 잠들지 못하고, 천장의 균열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균열이 아니라 틈새였다. 아주 작은 틈새였지만, 그 틈새를 통해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쪽 손을 움켜쥐었다. 그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걸 놓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