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위, 47개의 숨결
"야, 너랑 잤던 사람 진짜 많아?"
술 한 잔 뺀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23층 창밖의 네온사인이 서로 다른 색깔로 번쩍였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한숨이 아니라, 그저 숨을 뱉었다. 갑자기 방 전체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숫자가 아닌 권력의 잔해
나는 숫자를 듣고 싶지 않았다.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잔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뒤덜미를 어루만지는 잔상, 누군가의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는 잔상. 숫자는 그저 알려주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장면을 직접 연출하게 만들 테니까.
왜 나는 그 누구보다 더 많이, 더 깊게, 더 오래 누릴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까?
그건 평등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원한 건 전액 독점이었다. 과거마저도. 그녀가 태어나기 전의 시간까지도 뒤덮고 싶은 무언의 탐욕.
두 남자, 한 여자, 그리고 텅 빈 냉장고
민재는 유리에게 물었다. 오늘밤 같이 자려면 얼마를 내야 하냐고. 유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나도 안 받아.
그럼 뭘 원해?
너한테도 똑같이 받고 싶어.
그날 밤 민재는 유리의 집 냉장고를 열어봤다. 맥주 캔 둘, 딸기 잼 반 통, 그리고 낙서가 가득한 메모 한 장. 민재도, 준호도, 내가 나를 먼저 채워야지.
네일샵 3번 좌석, 14시 30분
지은은 네일샵에서 손톱을 갈무리하며 휴대폰을 쳐다봤다. 연락이 없었다. 그녀가 만난 남자들 중 유독 한 명만이 ‘과거 얘기 금지’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 남자의 이름은 태현. 첫 키스를 나누던 밤, 태현은 말했다.
네 과거는 박제하면 안 돼.
그럼 넌 뭘 원해?
지금 이 순간만. 그게 전부.
지은은 네일샵 아가씨에게 얘기했다.
예전엔 손톱을 짧게 깎았는데, 요즘은 길게 유지하려고요.
연애 때문인가요?
아니요. 그냥… 제가 자라고 있어서.
왜 우리는 불완전한 소유에 환장하는가
심리학자 슬로터다이크는 말했다. 현대인은 불가능한 소유를 향한 욕망 때문에 끊임없이 화해의 대리인을 찾는다. 그 대리인이 바로 질투다. 질투는 내가 갖지 못한 과거를 마치 내가 이미 놓친 미래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더 잔인하다.
우리는 평등을 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불평등의 해골 위에서 평등을 포즈만 내고 있었다. 그녀의 과거는 이미 내 손아귀에 들어올 수 없는 영토다. 전리품도, 재산도 아닌. 그런데도 우리는 그 영토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초조해한다. 아니, 그 초조함 자체를 사랑한다.
테이블 위에 놓인 질문
밤이 깊어서 이제 더 이상 숫자를 묻지 않는다. 대신 나는 그녀에게, 아니 나에게 묻는다.
과거의 숫자가 아니라, 그녀가 내 과거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거야말로 왜 평등을 외치지 못하게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