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흰 캔버스 위에 남겨진 말

열아홉 모델이 남긴 실루엣, 스물다섯 화가가 지우지 못한 선. 아트센터 4층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단 하루의 일그러진 우정.

누드모델미대생금기그리다지우다

흰 캔버스 위에 남겨진 말

나는 페인트를 섞다가 문득 손을 멈췄다. 모델이 옷을 풀어 허리로 내리는 소리, 작은 단추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날 서울예고 인근 아트센터 4층 스튜디오는 유난히 차가웠다. 네가 처음 완전히 나의 눈앞에 드러났을 때, 나는 캔버스보다 커다란 공백을 떠올렸다. 스물다섯, 너는 열아홉이었지.


그림자의 높이

칼날 같은 겨울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너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나는 붓 대신 시선으로만 너를 따라가며 윤곽을 그렸다. 실제 네 몸보다 흰 캔버스에 먼저 선 하나를 긋는 일이 두려웠다.

이건 금지된 각도야. 네가 여기 선 이유는 예술이 아니라, 나의 교만한 시선이야.

“선생님, 포즈가 이래도 되나요?”
네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대답 대신 물감을 흔들었다. 빨강이 지나치게 짙었다. 붓 한 번 흔들 때마다 네 실루엣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만의 규칙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누군가의 몸을 합법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날 나는 다르게 느꼈다. 너의 왼쪽 가슴 위 작은 점 하나를 지울 수 없었다. 네가 조심스레 무릎을 접었을 때, 나는 이미 너를 만지고 있었다. 붓끝이 아닌 시선으로.

안쪽 허벅지에 드리운 그림자, 광택 나는 콧망울, 숨이 차오르는 복부.

나는 지금 범죄를 저지르고 있을까?


기억 세 조각

1. 유리잔과 숨

청소 시간, 유진이 스튜디오 뒷문에서 나를 불렀다. “선생님, 근데 진짜로 아무도 안 만져요? 그냥 그려만?”
나는 대답을 피했다. 유진의 손에 든 유리잔이 떨렸다. 물이었는데도, 우리 둘 다 취해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유진의 점 하나를 연필로 그렸다. 지우고 다시 그렸다. 이마저도 지우고 말았다.

2. 문 앞의 발소리

한밤중, 유진이 메시지를 보냈다. [사진: 발등에 번진 청록 물감]
“선생님, 이색 물감 안 지워져요. 어떡하죠?”
나는 답장하지 않았다. 대신 현관문 앞에 앉아 유진의 발걸음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유진이 떠난 자리에 남은 향기만으로 나는 오랫동안 허공에 선을 그었다.

3. 허리 곡선 위로 흐르는 붓

마지막 날, 유진이 옷을 입으며 말했다. “선생님, 혹시 제 얼굴은 그리신 거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화났다. 얼굴을 그리지 않은 건, 유진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유진의 몸만 기억하고 싶었다. 이름, 표정, 목소리—모두 지워야만 했다. 그날 나는 붓을 내려놓았다. 유진은 내게서 사라졌지만, 유진의 허리 곡선은 아직도 나의 손끝에 남아 있다.


그리고 지우다

우리는 금기를 통해 욕망을 정제한다. 유진은 벗었지만, 나는 만질 수 없었다. 그래서 유진은 더 완벽해졌다. 캔버스 위가 아닌, 나의 머릿속에서만.

만일 그날 유진을 만졌다면, 지금 이 불타는 상상은 사라졌을까?

유진은 나에게서 스물일곱 번째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유진의 얼굴을 완성하지 못했다. 얼굴은 너무 많은 말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유진의 이름 대신 ‘모델 27’이라고 적었다. 캔버스에는 흰 여백만이 남았다.


흰 여백 위에

나는 아직도 그날의 유진을 만지고 있다. 캔버스 위에 아무도 만질 수 없는 사람을 그릴 때마다, 유진의 점 하나가 번져 나온다. 그 점은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다. 흰 물감으로 덮어도, 새하얀 여백으로 남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나요? 흰 캔버스 위에, 아무도 만질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고 당신은, 과연 그 손길을 멈출 수 있을까요?

←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