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좋아한다는 말이 업무 지시사항이 된 밤, 나는 그를 놓았다

KPI로 재는 연애, 숫자로 포장한 사랑. 그녀가 47층 옥상에서 버린 건 계산서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연애노동관계권력허무한집착욕망의끝

오늘도 11시 57분. 휴대폰 알림이 울린다.

[오늘도 좋아해. 확인 부탁]

나는 그 문장을 보며 가슴이 아닌 업무 메모장을 열었다. 오늘도 체크해야 할 리스트: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 3회, 눈 맞춤 7초, 스킨십 2회. 그리고 그의 반응은? 미소 1회, 눈빛 회피 2회. 오늘은 평균치보다 낮다. 주말에 보상을 더 줘야 할까.


냉장고에 붙은 우리의 사랑 지표

빨간색 펜으로 쓴 숫자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 월요일: 그가 나를 본 횟수 47번 (목표치 50)
  • 화요일: 그가 웃어준 횟수 3번 (지난주 대비 -2)
  • 수요일: 그가 먼저 안아준 횟수 0번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나는 이 숫자들을 기록하며 살았다. 그의 눈빛 대신 그래프를, 그의 손길 대신 수치를 탐닉했다. 연애가 되레 더 확실해진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나는 도대체 뭐를 하고 있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의 온도를 재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사랑을 강제로 끓여내는 것인가."


그녀는 왜 아침마다 사랑 지수를 확인할까

서진은 29살, 마케팅 회사에서 일한다. 그녀는 사랑을 마치 광고 캠페인처럼 운영했다.

아침 7시. 서진은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한다.

[어제 그가 보낸 하트 7개. 기대치 10개. 다시 계산 필요]

화장실 거울 앞에서 그녀는 오늘의 전략을 짠다. '점심에 데려가면 2개, 저녁에 영화 보면 3개... 그러면 오늘은 12개가 나올 거야.' 그녀는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프로젝트 성공을 예상하는 PM의 표정이었다.

그녀의 연인 민수는 그런 서진을 보며 말했다.

한 달 전, 그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 오늘은 그냥 같이 있을까?"

서진은 당황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는 급히 휴대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오늘은 좋아요 횟수 8번 예정이었는데..."

민수는 그녀의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진아.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말, 하루 몇 번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47층 회사 rooftop의 진실

서진은 그날 퇴근 후 회사 옥상에 올랐다.

서울의 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민수에게 메시지를 썼다.

[오늘 하루도 사랑했다는 계산서를 보내지 않을게]

보내지 못하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47층 아래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아름답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사랑의 증명이 아니었나.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달라고 애원하는 것보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지 못했는지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건 아닐까."


욕망의 정체

우리는 왜 사랑을 통계로 바꾸는가.

연애가 노동이 되는 순간,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었다.

우리는 두려웠다.

갑자기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오늘 100%였던 그의 사랑이 내일은 50%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래서 우리는 죽어라 확인했다. 하루에 몇 번 웃는지, 몇 번 안아주는지, 몇 번 '사랑해'라고 말하는지.

우리는 통제욕망에 사로잡혔다.

사랑은 예측할 수 없는 것. 그 불확실함이 두려웠던 것이다. '만약 내가 더 잘하면, 더 많이 주면, 더 열심히 하면... 그가 안 떠날 거야'라는 착각.

우리는 자기 보호를 포기하지 못했다.

진짜 사랑은 취약함이다. "나는 네가 나를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 하지만 우리는 그 취약함을 숫자로 감쌌다.


나는 그를 놓았다

그날 밤, 나는 휴대폰을 껐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민수야. 내일부터 내가 널 사랑하는 걸 기록하지 않을게."

그는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너는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제 나는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는 대신, 내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지를 발견해보려고 해."

그날 밤, 우리는 숫자 대신 침묵을 나눴다. 그 침묵은 무서웠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마지막 질문

당신은 어제 사랑한 사람의 KPI를 확인했나.

그리고 그 숫자가 없이,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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