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나는 모든 걸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없이 내 손에 들어오더니

순진함과 타락이 마주친 순간, 서로의 무지를 탐닉하던 네 남녀의 떨림. 흰 옷 위로 스며드는 때 묻은 손끝의 전율.

순진함금기욕망자각초기관계
나는 모든 걸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없이 내 손에 들어오더니

책방 한켠에서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제가 뭘 잘못 읽은 건가요?’

그는 아직 펼치지도 못한 책에, 제목부터 덜컥 고백했다. 손가락은 첫 장을 두들기는데 너무 하얘서, 내가 지난 몇 년 간 숨겨온 때가 묻은 손끝이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이미 결말을 아는 책들 너머로, 그 아무것도 모르는 눈동자를 마주치고 있었다. 사실 나는 책이 아니라, 그의 눈빛을 읽고 있었다.


네가 가진 게 없어서 괜찮아졌다

그가 내게 다가온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모르는’ 것이었다. 지하철에서 술 취한 아저씨가 으르렁거려도 눈을 희번덕거리는 이유, 혼술하던 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 엘리베이터에서 남자 셋이 우르르 타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이유를 모르는 것.

그 무지가 얼마나 고귀한지 나는 알았다.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걸 아직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의 믿음은 한낱 어린아이처럼 말간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맑을 수 없는 몸을 숨기고 싶었다. 아니, 더러운 손으로 그 옷을 더럽히고 싶었다.


사례 1: ‘어린 선생’과 음산한 연구실

연구실 조교 ‘혜원’은 26살, 남학생 ‘도윤’은 스무 살이었다. 도윤은 아직 성적 자기 결정권도, 숙취도, 부모님 몰래 낮 선글라스를 쓰고 모텔 가는 경험도 없었다. 그는 아래층 빨래방에서도 코트 단추를 꼭 채우고, 빨간 봉투를 잘못 받으면 얼굴이 새빨개지는 아이였다.

혜원은 뼈대 있는 교수님 밑에서 ‘악취 나는 실험’을 담당했다. 쥐 뇌를 도려내는 냄새, 장기를 보관하는 포르말린 냄새가 옷에 배어 있었다. 그녀는 도윤에게 유리 슬라이드 조작을 가르치며, 틈틈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 도윤은 그 터치를 ‘선생님의 관심’으로, 혜원은 ‘내가 망친 순수’로 읽었다.

‘여기서 한 방울 떨어뜨리면… 색이 변하죠?’

도윤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잔잔해서 더 위험했다. 혜원은 그 마음속 폭풍이 얼마나 단순한지, 끝내 알고 싶어졌다.

그날 밤 둘은 연구실 불을 끄고, 현미경 불빛 하나만 남겼다. 혜원 도윤의 손목을 잡고 40배 렌즈 아래 감염 세포를 보여줬다. 세포는 초록빛으로 퍼졌다. 도윤은 그 빛의 감염이 자신의 몸으로 옮겨왔다고 믿었다. 그 착각이 너무 아름다워서, 혜원은 더 깊게 들어가고 싶었다.


사례 2: 룸메이트 ‘예린’과 고향 친구 ‘현우’

예린은 29살, 현우는 25살이었다. 현우는 어릴 적부터 예린을 ‘언니’라 불렀다. 군 제대 후 서울로 올라와 예린의 원룸을 얻어 살았다. 현우는 여전히 콩나물국에 계란 한 개 터뜨려 먹는 걸 ‘감동’이라고 했고, 고기집에서 숯불 지글거리는 걸 보며 ‘신기하다’고 했다.

예린은 매일 밤 게임을 하며 담배를 피웠다. 현우는 그 연기를 ‘언니의 숨결’이라고 부르며, 맡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예린은 현우가 몰래 쓰는 다이어리를 봤다. 그 안에 현우는 예린을 ‘우주에서 가장 큰 별’이라고 적었다.

나는 그 별이 이미 반짝이지 않는 걸 아는데, 너만은 그걸 모르는 거야?

예린은 현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우의 첫 키스를 뺏었다. 현우는 그걸 ‘선물’이라고 여겼다. 예린은 그 착각에 실제로 몸을 던졌다. 예린의 몸은 이미 여러 사람에게 닳아 있었지만, 현우는 그래도 그녀를 ‘순수’라고 부르고 싶어 했다. 그 불일치가 둘 다를 미치게 했다.


왜 우리는 모르는 사람에게 홀린가

심리학자들은 ‘애초에 몰랐기 때문에 생기는 이끌림’을 naïveté attraction이라 부른다. 남아 있는 흰 공간이 내게는 이미 찢기고 찌그러진 종이처럼 느껴질 때, 그 흰 공간을 더 이상 훼손하지 못하게, 혹은 반대로 내가 유일하게 훼손하고 싶게 된다.

우리는 타인의 무지를 통해, 자신의 타락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그 확인이 너무 선명해서, 그 선함을 더럽히는 순간에만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순수를 벗기는 대신, 순수가 나를 덮씌워 주길 바라는 역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손이, 내가 아직 건드리지 못한 곳을 만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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