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떨어진 운동화 끈을 고쳐 매던 그의 손끝이 떨린다. 나는 그 떨림이 내가 아침에 몰래 휴지통에 던져버린 낡은 봉투 때문일까 봐,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 여보, 너 오늘 뭘 버렸어?
나는 멀쩡한 표정을 갖추려 혀끝을 굴린다.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한 그 봉투는 이미 아파트 단지 음식물쓰레기 수거장 깊숙이 파묻혔을 텐데.
한 숨 돌려 죽인 오후
검지와 엄지 사이로 투명 테이프를 뜯던 순간, 나는 마약 중독자처럼 손가락이 떨렸다. 봉투 안에서 나온 건 한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과 짧은 편지. 사진 속 스물다섯쯤 되어 보이는 여자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있었고, 글씨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너와 함께한 시간은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는 기분이야. 멈추지 않았으면 해.
숫제 울화가 치밀었다. 그토록 아끼던 ‘추억’이 침대 맡 서랍 깊숙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욕이었다. 나는 테이프를 다시 붙이지 않았다. 그냥 찢어서 배로 접고, 배로 또 접었다. 손바닥 크기만큼 말아서 화장실 변기에 던졌다. 물이 내린 뒤에도 한참을 쳐다보았다.
버려지지 않은 과거가 숨쉬는 법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봉투를 버린다고 해서 그의 기억 한 조각이 사라질 리 없다는 걸. 하지만 ‘내가 있는 이 집’에 그걸 둘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의 숨결이 서늘하게 스미는 느낌. 그날 이후 나는 침대 시트를 하루에도 두 번 갈았다. 태양이 지면서 길게 드리운 그림자 하나하나가 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느껴졌다.
민서의 하얀 상자, 지우는 눈
민서는 결혼 3년 차 주부다. 남편이 출장 간 사흘 동안, 그가 대학 시절 만들었던 ‘추억 상자’를 발견했다. 작고 하얀 상자 안에는 옛 여자친구가 써준 카드, 영화 표, 어깨에 묻은 긴 머리카락 한 올이 들어 있었다. 민서는 머리카락을 밖으로 꺼내 휴지에 싸서 변기에 넣었다. 카드는 읽지도 않고 반으로 찢어 부엌 싱크대에서 태웠다. 재떨이를 씻어내며 느낀 건 시원함이 아니라 두려움: ‘내가 이 정도였나.’
남편이 돌아왔을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그날 밤 침대맡 서랍을 열어보는 그의 손길이 불안하게 맴돌았다. 아무것도 없자 그는 한참을 벌떡앉았다. 어디 있냐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속삭였다.
- 아, 정리했구나.
그 말 한마디 속에는 ‘내가 가진 지난 시간도 함께 치워졌다’는 서늘한 비수가 있었다. 민서는 TV를 켰다. 뉴스 앵커가 무심코 돌려주는 말들이 그대로 부부 사이에 낀 틈새로 스며들었다.
유리 심장을 흔드는 손
우리는 왜 상대의 과거가 이렇게 무거운가. 결혼 전엔 알고 싶지도 않았던 ‘과거’가, 법적으로 한 지붕 아래 들어오는 순간 투명 유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유리를 흔드는 건 언제나 작은 손놀림이다. 한 장의 사진, 한 올의 머리카락, 한 줄의 추억. 다만 그걸 없애면 없앨수록, 흔적은 오히려 격렬하게 남는다.
‘내가 없던 시간’에도 그가 숨 쉬었다는 사실은, 마치 나를 배신한 것처럼 아프다.
그물에 걸린 심장
심리학자 윤혜진은 말한다. “기혼자가 배우자의 과거 물건을 몰래 버리는 행동은 단순한 질투의 산물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지독한 ‘독점욕’과 ‘영원 불변’에 대한 망상이 만든 일종의 ‘순간적 폭력’이다. 동시에 두려움이다. ‘나는 그의 모든 시간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뼈아픈 자각 앞에서, 우리는 지푸라기라도 건진다.”
그렇다. 우리는 단지 시간을 긁어내고 싶었던 것뿐이다. 3년 전의 그녀, 5년 전의 그날 밤을 지워버리면 지금의 우리 사이가 단단해질 거라는 착각. 하지만 지워야 할 건 상대의 과거가 아니라, 내 안의 불안이었다.
다시 피어오르는 재
며칠 뒤, 남편은 조용히 물었다.
- 그 편지... 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숨기려 했지만 이미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한참 말이 없다가 툭 던졌다.
- 사실 나도 버리고 싶었어. 근데 못 하겠더라. 버리면 그때 내가 사라질 것 같아서.
그날 밤 우리는 부엌 바닥에 앉아 소주 한 잔씩 했다. 봉투는 사라졌지만, 대신 그가 살아온 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차지할 수 없는, 차지해서도 안 되는 시간들.
내가 몰래 버린 건 과거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인생을 조금이라도 움켜쥐려던 내 욕망이었다.
당신은 지금도 누군가의 과거를 숨기거나 지우려는 손끝을 떨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