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그녀가 입에 담는 순간, 유리컵이 부르르 떨렸다. 세 글자가 실내에 퍼지는 게 싫었다. 마치 단추 잘못 끼운 셔츠처럼 몸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너도 그렇게 불러야지?”
그녀는 말했다. 눈빛이 떨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저녁 8시 47분, 그녀 집 거실. 에어컨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쓱 지나갔다.
숨 막히는 이름표
여자친구.
세상에 이보다 더 조심스러운 호칭이 있을까. 동무, 애인, 파트너, 사랑. 어떤 말도 이 단어처럼 답답하게 공기를 먹지 못한다. 왜일까.
아마도 여기엔 소유가 담겨 있어서다. 여자-친구. 앞뒤 단어 하나씩 끼워 넣으면 끝. 그러나 그 사이엔 무수한 규칙이 숨어 있다. ‘너는 내 것이다’, ‘허락 없이는 다른 곳을 향해선 안 된다’, ‘속옷까지도 상의가 필요하다’.
그래서일까. 말이 나올 때마다 가슴 한쪽이 꿈틀거린다.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자꾸 그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여자친구라는 단어는 사랑보다 더 무거운 짐이 되고, 짐이 되면서도 왠지 모르게 아찔한 자극이 된다.
미나는 왜 떠났는지
미나는 매일 밤 나의 이름을 확인했다.
“나 여자친구 맞지?”
베개 끝에서 조용히, 또렷이.
맞다고 대답하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시험 끝난 아이처럼 어깨가 축 늘어졌다. 다음날 아침, 그녀는 다시 물었다.
“나 여자친구 맞지?”
그때마다 나는 말했다.
“맞아.”
그래도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다. 눈빛이 파고들었다. ‘정말 맞냐’고, ‘혹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여자친구라 부르는 게 아니냐’고.
그러던 어느 날, 미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자친구’라는 말이 싫어. 네가 말할 때마다 내가 작아져. 소유물 같아.”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대답이 없었다.
그날 이후로 미나는 나를 피했다. 사내에서 돌아다니며 “네 여자친구 어디 갔어?”라고 물었을 때, 나는 대답했다.
“떠났어.”
그런데 놀라운 건, 그 말이 훨씬 편안했다는 점이다.
소연은 계속 있었다
소연은 이름을 좋아했다.
“여자친구로 불려도 돼.”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녀도 미나 못지않게 조심스러웠다. “여자친구라고 해도, 네가 다른 사람과 만나면 그건 네 자유야. 단, 그때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해.”
그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허락과 금지가 섞인 자유.
우리는 룰을 만들었다. 서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시간. 그때만큼은 여자친구라는 말이 달콤하게 쓰였다. 왜일까. 아마도 이미 떠날 각오가 되어 있어서 그런가.
“나, 네 여자친구 맞지?”
“맞아.”
대답할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헤어질 날짜를 떠올렸다. 소연은 항상 말했다.
“언젠간 끝나겠지. 그래도 지금은 여자친구로 불리는 게 좋아.”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끝을 알면서도, 이름표를 부여받는 순간의 전율을 놓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름 뒤에 숨은 욕망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인간은 정체성을 확인받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의 라벨을 찾는다. 그러나 라벨은 동시에 우리를 가두는 새장이 된다. 여자친구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그 안에는 두 가지 욕망이 섞여 있다.
첫째, 상대를 확실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둘째, 그렇게 만들면서도 자유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망.
그래서 우리는 줄다리기를 한다. 이름표를 달아주고, 끊어질까 봐 조심스럽게 잡는다. 상대가 떠날까 두려워서 더 세게 묶고, 묶으면서도 숨이 막힌다.
여자친구라는 말은 그렇게 숨통을 조이는 지퍼다. 지퍼를 올리면 ‘우리는 특별한 사이’라는 안도감이 생기지만, 동시에 우리는 더 이상 아무에게도 열려 있지 않다는 불안감이 따라붙는다.
그 불안감이 곧 흥분이 된다.
질식할 것 같은 공간, 그러나 탈출하고 싶지 않은 공간. 그곳이 바로 여자친구라는 이름이다.
돌아온 미나의 메시지
며칠 전, 미나에게서 카톡이 왔다.
‘나 요즘 생각나요. 너랑 있을 때, 여자친구라는 말이 제일 무서웠어. 근데 지나고 보니 그게 그리웠네요.’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봤다. 여자친구라는 단어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잡으려 하면 미끄러지고, 놓아버리면 날아간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규정을 좋아하면서도 그 규정에 갇혀 버린다.
여자친구라는 말, 당신은 그 단어를 입에 담을 때 어떤 맛이 났나.
숨이 턱 막히는 단맛, 아니면 뒤끝이 쓴 자유인가.
그래서, 네가 그녀를 부를 때, 진짜 원하는 건 이름인가, 아니면 이름 없는 빈자리에서 벌어지는 허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