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손가락이 화면을 스윽 쓸어올리는 순간, 숨을 멈춘다. 47주 전 찍은 그 사진이 여전히 거기 있다. 예은이 카페 창가에 앉아 햇살 아래 머리카락을 흩날리던 순간. 지우려다 말았던 그날이, 오늘도 나를 죄수처럼 만든다.
- 삭제하려면 오른손 엄지로 꾹 누르면 돼. 한 번만 누르면 돼. 그게 왜 안 돼?
지울 수 없는 패배의 증거
사실은 알고 있다. 지운다고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사진을 지우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일부를 절단하려 한다. 예은의 눈빛 한 줌, 그날의 온도, 살짝 미소 지으며 내민 손가락.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한 조각이 되어버렸으니까.
휴지통으로 끌어다 놓으면 휴대폰이 묻는다. '정말로 삭제하시겠습니까?' 그 말은 번역하면 이렇다. '당신의 패배를 영원히 인정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손가락이 떨린다. 아직 항복서류에 서명할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이미 지웠을지도 모른다
동현은 매일 밤 2시 17분이면 갤러리를 연다. 3년 전 여름, 수영이와 제주도로 떠났을 때 찍은 1,847장. 그는 아직도 숫자를 외운다.
"야, 너 아직도 그 사진 안 지웠어?" 동료가 술자리에서 물었다.
동현은 대답 대신 유리잔을 들었다. 그게 지우는 게 아니야.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내가 죽은 거야.
수영이는 새 남자와 사진을 올렸다. 행복해 보였다. 동현은 그녀의 새 사진을 확대해서 들여다봤다. 수영이의 손목에 차 있던 시계는 없었다. 그 시계는 동현이 생일에 선물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건 버렸네. 그 생각에 웃음이 났다. 하지만 그 시계마저도 동현의 갤러리에는 살아 있었다. 2021년 7월 13일, 18시 23분. 수영이가 시계를 받고 포옹하던 순간.
숨겨둔 승리의 판타지
우리는 사진을 지우지 않는 이유를 슬픔이라고 속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음흉한 욕망이 도사린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오래 기다렸다고 말하면 감동할지도.
그녀도 가끔 날 떠올릴지도.
이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끝나지 않은 전쟁의 병참 기지다. 사진 속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다시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새벽 3시, 술기운이 오르면. '혹시나'라는 말 한 마디가 온몸을 타고 흐른다.
패배를 즐기는 방식
심리학자 윤석준은 말한다. "우리는 실은 패배를 즐기고 있다고요. 상처받은 자의 도덕적 우위, 억울함의 달콤함. 사진 속 연인은 우리에게 완벽한 가해자 역할을 맡긴다."
그래서 나는 희생양이 되기로 했다.
사진을 지우지 않는 것은 끝내지 않은復仇(복수)다. 하지만 그 복수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오직 나만이 이 전쟁의 진짜 영웅이라는 걸 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게 아팠는지. 그것만이 나를 특별하게 만든다.
혹시 당신도 지금, 확인 중인가
손을 내려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엄지가 화면을 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갤러리 맨 아래, 맨 위, 혹은 숨겨둔 폴더 어딘가.
그 사진은 아직도 당신의 패배를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건 이것이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그 사람도 똑같은 사진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모두 전쟁에서 살아남은 병사인 척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같은 전숬를 반복하고 있다. 휴전선도 없고, 승자도 없는.
그래서 나는 매일 밤 묻는다. "오늘은 지울까?" 그리고 대답은 항상 같다. "내일은 지울 거야. 분명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