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래, 아직 밤이 긴데"
밤 11시43분, 도쿄 시모키타자와의 모텔. 희은은 눈을 감고 있다 떴다를 반복했다. 커튼 틈으로 스며드는 네온사인이 침대 끝을 간질였다. 휴대폰 화면, 조용했다. 서울에서 1,200킬로미터 떨어진 그의 카톡은 마지막으로 오후 3시에 찍혀 있었다. "회의 끝나고 바로 들어갈게. 사랑해."
바로 옆에서 준혁이 숨을 골랐다. 3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희은의 동호회 선배였다. 같은 회사 지점이 도쿄에 생기면서 반가워 안기다가 이불이 되었다. 희은은 천천히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거울 속 눈동자가 아직도 반짝였다. 오르가즘이 사라지자마자 찾아온 건, 이름 모를 죄책감이 아니었다. ‘도대체 서울의 지금은 몇 시지?’라는 계산뿐이었다.
꿈결 같은 떨림, 뒤틀린 나침반
장거리 연애의 본질은 아이러니다. 서로를 향한 헌신을 증명하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 정적이 너무 커서 손끝이 근질거린다. ‘혹시 나만 이러는 걸까?’ 라는 질문을 꺼내기엔 너무 부끄럽고, ‘당연히 저쪽도 같은 상황일 거야’ 라고 확신하기엔 너무 공허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서로를 감시한다. 카메라 플래시처럼 순간을 포착하려 들지만, 결국 찍히는 건 흐릿한 실루엣뿐이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어서, 상상이 빈 공간을 메운다. 그 상상의 색은 늘 자신이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에 맞춰진다. “여기서 끝내자.” “나도 지쳤어.” “다른 사람 생겼어.”
지하철 2호선, 익명의 입맞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마치 너랑 연락 끊긴 시간이 누군가의 품에 숨을 곳을 만들어준 것 같았어."
지선은 6개월째 부산행 KTX를 타고 있었다. 서울에 사는 유민이 먼저 프로포즈한 장거리였지만, 둘 다 누가 먼저 ‘볼 일’이 생길지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하면 지선은 서면역 근처 펜션에서 하루를 보낸 뒤 유민의 집 앞에서 “출장 끝!”이라며 문자를 보냈다.
그날도 남자 이름은 민수였다. 펜션 사장이 아닌, 우연히 옆자리에서 같이 맥주를 마신 동네 친구였다. 지선은 유민의 영상통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 화면이 왜 안 잠겨 있지?’ 라는 불안감보다 ‘아, 이건 집착이야’ 라는 합리화가 더 빨랐다. 그리고 30분 뒤, 유민의 카톡이 왔다. “야, 나도 오늘 갑자기 친구 만나느라 통화 못했어. 내일 봐!”
나비효과, 모래시계 뒤집기
우리가 진짜 두려워하는 건, 단지 상대방의 배신이 아니라 ‘내가 먼저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는 가능성이다.
심리학자들은 ‘근거 없는 확신’이라는 말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상대를 의심하면서도 내심 ‘나도 모르게 그랬을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은 불륜을 자아낸다. 어차피 둘 다 똑같을 거라는 자기예언. 결국 누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한쪽이 시계를 뒤집었을 때 다른 쪽도 모래알을 뿌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3개월 뒤, 인천공항
희은은 도쿄에서 돌아왔다. 짐을 싣는 15분, 그녀는 유민에게서 온 문자를 읽었다. “우리, 오늘 밤에 보자. 네가 생각하는 그 말 하려고.” 민수와의 관계는 끝났다. 하루는 민수가 “난 그냥 너의 서울 대리인”이라고 말했을 때였다. 희은은 그 말이 민수의 자격지심인지, 아니면 자신의 죄책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공항 버스 안에서 희은은 유민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봤다. 3개월 전과 똑같은 사진. 하지만 뭔가 달라졌다. ‘그가 나 없는 시간 동안 누구 품에 있었을까?’ 라는 질문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대신 든 건, ‘내가 없는 동안 내가 누구 품에 있었을까?’ 라는 되돌림이었다.
너는 아직도 그 질문을 피해 다니고 있니
"당신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그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사랑하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희은은 짐을 찾으러 나섰다. 벨트 위로 돌아가는 가방들 사이,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가 진짜로 두려워하는 건, 이별이 아니라 내가 상처받는 순간을 놓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먼저 시작했어. 그러니까 나도 끝내야 해.’
공항의 불빛이 서서히 희미해졌다. 희은은 가방을 들고 택시를 잡았다. 창밖으로 스치는 도시는 3개월 만에 조금 더 커져 있었다. 아니, 그녀의 눈이 더 작아진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음에 유민과 마주칠 때, 먼저 물어야 한다.
"너는 몇 번이나 나를 떠올렸어?"
그리고 그 다음엔, 자신에게도 물어야 한다.
"내가 몇 번이나 너를 떠올리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