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고 있었어요?”
‘떨고 있었어요?’
그 말이 귀등을 간질이던 순간, 나는 78번 구석좌석에 있었다. 막차는 을지로 사거리를 휘적 지나고 있었고, 창밖 네온이 연초록-분홍-청색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두 칸 앞에 서 있던 낯선 사람이었다. 검은 캐리어를 들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고, 눈동자는 아무 반사광도 없이 칠흑처럼 깊었다. 내가 잠깐 심장이 터질 듯 뛰어 오르던 순간, 그의 손등이 흔들리는 차체 흔들림 하나 없이 내 왼쪽 허벅지에 살포시 닿았다.
- 1초 반쯤 됐을까. 뜨거움은 아니었다. 차라리 싸늘했다. 그래서 더 선명했다.
깜깜한 감각의 굴
“이건 단순한 접촉사고가 아니야. 당신이 원했을지도 몰라.”
3초 만에 내 몸은 기억을 새로 썼다. 그날 이후, 나는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시간대 버스를 몇 번이나 탔다. 왜 그랬을까. 단순히 그의 손길이었던가. 아니, 그날 내가 이미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가가 문제였다. 끓어오르는 갈증처럼 치밀어 오른 건 단순한 성욕이 아니었다. 침범당하고 싶은 욕망—그러나 남들 앞에선 절대 고백할 수 없는—이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몸을 숨기며 산다. 지하철 끝 칸에서 팔짱을 꼭 끼고, 엘리베이터 구석에 몸을 구겨 넣고. 그래서인지 누군가 나의 방어벽을 빈틈없이 관통했을 때, 죄책감과 환희가 뒤섞여버린다. 그 3초는 나를 ‘순진한 피해자’와 ‘은밀한 공모자’ 사이에 세웠다.
“미안해요, 손이 미끄러졌나 봐요”
세진은 24살 디자인 학원 강사였다. 하루는 야근 끝에 939번 좌석버스를 탔다. 앞자리에 앉은 서른 중반의 남자—윤관, 나중에 알고 보니 병원 마케팅팀 직원—이 스마트폰을 떨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고개를 드는 순간, 손등이 세진의 무릎 위에 스치고 지나갔다. 세진은 그날 밤 집 거실에 앉아 스웨터를 두르고도 몸이 화끈거렸다고 했다.
- “계속 떨렸어요. 미친 듯이. 그래서 다음 날, 저는 똑같은 시간 똑같은 버스를 탔죠.”
이튿날, 윤관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버스가 요동칠 때마다 그의 손가락 하나가 살짝씩 세진의 청바지 위로 이동했다. 셋째 날엔 엄지가 2㎝ 정도 안쪽 파인선에 머물렀다. 아주 작은 눈치싸움이었지만, 그들은 전쟁이라 부르지 않았다. 서로의 숨을 세어보며, 도착 정거장이 다가오면 뒤늦게 ‘죄송합니다’를 주고받았다. 그게 전부였다.
“그 냄새가 아직 코 끝에”
준영은 31살 회계사. 지하철 2호선 막차, 문이 닫히려는 찰나에 탄 그는 코 앞에 선 여자의 머리카락 냄새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샴푸와 땀과 지하철 철판 냄새가 섞인 그 향기를, 집에 돌아가 머리맡에 누워도 계속 맡을 수 있었다. 2주 후, 그는 같은 시간대 같은 칸에 서 있었다. 여자는 다시 나타났고, 이번엔 준영이 아주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뺀다는 척하며 그녀의 손등을 살짝 스쳤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손등을 주먹으로 살짝 움켜쥐었다가 풀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준영은 내게 말했다.
- “그날 이후, 지하철을 타면 작은 전율이 일어나는 거 같아요. 제 손등이 아직도 뜨거워요. 0.3초짜리 화상처럼.”
왜 우리는 이 짧은 접촉에 매달리는가
1. 익명의 틈새
대중교통은 이름도 모르는 행성이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리면 다시는 마주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결코 책임질 수 없는 거리가 우리를 방종하게 만든다. ‘누가 봤는가’는 중요치 않다. ‘이것이 나의 욕망이라는 걸, 혹여나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 알아차릴까’ 하는 두려움이 흥분의 도화선이 된다.
2. 끝없는 되감기 가능성
3초는 너무 짧아서 왜곡되기 쉽다. 머릿속에서 0.2배속, 0.5배속, 2배속으로 되감으며 각도와 압력과 온도를 재조정한다. ‘혹시 그게 의도였을까? 아니면 나만 착각한 걸까?’ 그 미지를 되씹을수록 우리는 더 깊이 빠진다. 결정되지 않은 욕망은 더 큰 환각을 낳는다.
3.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
만약 그가 진지하게 연락처를 물었다면, 흥분은 금방 현실의 냄새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내 잡을 수 없는 것’은 마치 상처처럼 각인된다. 우리는 그 흔적을 계속 만져보는 거다. 새로운 흉터를 확인하듯.
당신은 아직도 그 3초를 새벽 3시에 되감는가
병원 침대에 누워도, 오피스텔 거울 앞에 서도, 혼자 드는 밥 한 숟가락 사이에도 그 손길이 남아 있다면, 당신은 단순히 추억에 젖은 게 아니다. 당신은 아직도 그날의 자신을 끌어안고 싶은 거다. 아직도 그 불안했던 몸을 다독이고 싶은 거다. 두려움과 환희 사이, 단 한 뼘의 공간을 비집고 지나간 그 누군가—당신은 그를 끝내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평생 발목을 잡힐 것인가.
그 손끝이 지금도 당신의 허벅지 위에 살아 숨 쉬고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