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아이를 원하지 않는 32세 아내, 41세 남편의 침묵이 깨지는 순간

출산을 거부하는 아내, 그리고 그걸 받아들인 척 살아온 남편. 생일 초 하나가 흔들릴 때, 그들은 서로의 욕망과 공포를 드러낸다. 침묵으로 지킨 9년, 오늘도 피임약을 삼키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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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하나가 꺼지는 순간

서른한 살 생일, 지수는 케이크 위에 초를 하나만 꽂았다.

  • 앞으로도, 둘이면 충분해.

나는 그 한 마디를 아직도 떠올린다. 불 붙은 초가 사르는 3초, 그 속에서 퍼져 나온 결말 없는 질문.

"우리, 둘이면 충분하지?"

불이 꺼지자 방안이 깜깜해졌다. 어둠 속에서 지수는 피식 웃었고, 나는 그 웃음을 내 가슴 속 깊이 찔러 넣었다.


내가 숨긴 눈동자의 온도

그래, 둘이면 충분해.

말했지만, 나는 아이를 원했다. 그걸 부정할수록 더 선명해졌다. 출근길 지하철, 유모차를 밀고 오는 남자를 보며 상상했다. 혹시 그가 나라면. 아이는 누가 닮았을까. 지수의 날카로운 턱선은 나에게서, 눈빛은 지수에게서.

그런 생각이 올라올 때마다 머릿속 누군가가 도장을 찍었다. 금기

지수는 그 글자를 몸에 새겼다. 피임약 복용 시간을 알람으로 맞추고, 살이 찔까 봐 매일 러닝머신을 돌렸다. 임신을 막는다는 건, 우리 사이에 아직도 성이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했다가도, 동시에 치가 떨렸다.

그녀의 몸은 문이 아니었다. 방어벽이었다.


지수의 일기, 혹은 나의 망상

회사에서 발견한 메모지 한 장. 지수가 다니던 창작학원 수업록이었다. 교사의 질문, 학생의 답.

강사: 가장 두려운 상황은?
지수: 누군가에게 완전히 소모되는 거예요. 아기를 낳으면 제 삶이 잘려 나가요.
강사: 왜요?
지수: 엄마는 사라지니까요. 지수라는 여자는.

나는 그 문장을 복사해 휴대폰에 저장했다. 잠들기 전마다 읽었다. 지수가 아니라, 그녀 안의 어떤 여자가 말한 건가. 나는 아내를 잃을까 봐 두려워했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건 지수가 아니라 ‘아이를 낳는 지수’였는가.


우리가 숨긴 체온

사촌 형의 결혼식 날, 예식장 복도에서 어린 조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계속 울었고 나는 당황했다. 그때 지수가 다가와 아이를 받아 안았다.

아이는 금세 잠잠해졌다. 지수는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 진짜 예쁘네. 근데, 없어도 돼.

그녀의 눈은 말 그대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반대편에 있었다. 아이를 낳을 용기 없는 자신을, 혹은 그걸 낳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침대 위에서 울었다. 지수는 내 품에 안겨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너도 원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나는… 내가 먼저.”

나는 그 말 끝을 붙이지 않았다. ‘죽을까 봐’ 혹은 ‘없어질까 봐’. 두려움은 똑같았다.


왜 우리는 출산을 두려워하는가

아이는 영원한 몫이다. 네가 죽어 없어져도, 아이는 살아남는다. 그래서 출산은 자기 죽음의 반복이다. 우리는 그 반복을 원치 않았다. 지수는 자신의 영원한 흔적이 두려웠고, 나는 그녀에게서 비롯된 영원이 두려웠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묶는 고리를 끊었다. 아이 대신 키운 건 침묵이다.


아직도 타오르는 초

오늘도 지수는 피임약을 삼켰다. 알람 소리에 그녀는 작은 종이컵으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걸 보기 싫어서 거실에서 TV를 켰다.

그때 지수가 물었다.

  • 너, 나중에 후회하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TV 화면 속 사람들은 웃고 있었다. 우리 없는 미래가 거기 있었다.

지수는 약통을 덮으며 말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금은 이후에 오는 말은 없었다. 어쩌면 그게 정답이었다. 우리 앞에 아직도 불타는 초 한 개. 그걸 함께 꺼야 할지, 아니면 누군가의 불씨를 새로 삼켜야 할지.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지 않는 미래를, 얼마나 오래 끌어안고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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