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베개 위에 긴 곱슬 머리카락이 있었대”
민서는 담배를 한 모금 댔다 뱉으며, 유리창에 서린 김만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랑 단둘만 쓰던 침대였잖아. 그런데 머리카락이 하나 끼어 있더라고. 내 머리랑 길이도 색깔도 달라.”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말이 잘리면 그만큼 책임이 줄어든다고 믿는 얼굴이었다. 민서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신발장 위에 올려놓은 열쇠를 꺼냈다. 한 손으로는 재현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는 열쇠를 쥐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서 나도 똑같이 할게.”
11시 47분, 현관 소리
밤 11시 47분, 재현은 잠이 들 듯 말 듯하다가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민서가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벗는 동작이 너무 느려서 불안감이 더 컸다.
“오늘 유진이 만났대. 너랑 잤대.”
재현은 입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민서는 침실로 걸어가더니 이불과 시트를 한 번에 찢듯 걷어 올렸다. 손끝이 떨렸지만, 눈은 초점을 잃지 않았다.
“이건? 너희가 뒤엉켰던 자리지.”
“미안해, 민서야—”
“됐어. 나도 똑같이 할게.”
전화는 15초 만에 연결됐다. ‘도현’이라는 이름이 불빛처럼 화면을 점령했다. 30분 뒤, 도현은 민서의 손목을 잡고 거실로 들어왔다. 재현은 부엌 뒤 창고 안에 숨었다. 숨을 크게 쉬면 들릴까 봐, 숨을 죽이면 끝내 들을 수 있을까 봐, 두려움에 몸이 굳었다. 바닥에 떨어진 손전등 불빛처럼, 민서의 숨소리가 문 너머로 흘러들어왔다.
지아, 오후 3시 12분
지아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입술을 다시 또 그렸다. 이틀 전 아침, 남편의 두피에서 뽑아 온 긴 머리카락을 발견한 날부터 립스틱을 두껍게 바르는 습관이 생겼다. 남편은 평소 지아가 바르지 않던 코럴핑크를 가장 좋아했다. 그 색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섞이는 순간을 떠올리며 입술을 물었다.
“그래, 나도 모르는 사람이랑 잠재우면 되는 거지.”
오후 3시 12분, 남편이 회사에 들어간 시간. 지아는 지난주 번호를 교환한 바텐더 지후에게 문자를 보냈다. 집으로 와. 오늘만. 지후가 도착했을 때, 지아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던 샴푸 향기를 풍겼다. 그 향기가 섞이는 순간, 지아는 눈을 감았다. 심장은 놀랄 만큼 차분했다. 이제 네가 나한테 미안해할 차례야.
복수가 아니라 ‘맞춤’
내가 더러워지는 게 복수일 줄 알았는데, 사실은 더러워지고 싶었던 거였을까.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인지부조화라는 말로 설명한다. 사람은 자신의 행동과 믿음이 어긋날 때 불편함을 느낀다. 그래서 더러움을 맞춘다. 상대의 죄와 나의 죄를 같은 눈금 위에 올린다. 그래야만 화해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일 뿐이다. 우리는 복수를 원한 게 아니라 동료애였다.
너도 나처럼 타락했으면 해. 그래야 우리가 같은 선상에 설 수 있어.
침대 위로 남은 냄새
민서는 다음 날 아침, 재현에게 말했다.
“나도 이제 너만큼 더러워졌어. 이제 우리 같이 샤워하면 되겠지?”
재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민서의 목덜미에 남은 것은 머리카락 한 올이 아니라, 생경한 향기였다. 지아는 아침에 남편의 눈치를 보며 욕실에서 강하게 양치질을 했다. 입 안에서 아직도 남은 냄새를 지우려고. 하지만 향기는 이미 베개, 이불, 벽지, 심지어 전등 스위치에 스며들어 있었다.
당신은 정말 복수를 원했나
복수의 침대에서 내려올 때, 우리의 몸은 누구의 향기로 가득한가. 그 향기는 상대의 죄를 물어내는 증거인가. 아니면 내가 더럽혀진 것에 대한 변명인가. 당신은 더러워지는 순간을 기다렸던 건 아닌가.
복수는 머리카락 한 올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누군가의 손끝에 남는 냄새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