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문을 닫고 나간 순간 나는 아직 거기 서 있었다
"너도 알잖아. 우리는 끝났어." 그녀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반지를 꼭 쥔 채 서 있었다. 금빛이 새까만 실내조명 아래서 차갑게 내려앉았다. 문이 닫히고 나서도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벌거벗은 발가락 사이로 차가운 대리석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아직 끝날 수 없어.
욕망은 왜 배신의 자국에서 더 단단해지는가
사람들은 사랑이 상처로 부풀어 오른다고 말한다. 거짓말이다. 사랑은 상처 속에 숨겨진 나를 부풀린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누웠다는 사실이 사실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왜?
그건 나의 결핍이 부풀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자신을 내어준 그녀의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작아진 인간이었다. 그 작음이 너무 선명해서, 이제는 죽을 때까지 잊힐 수 없는 맛이 되어버렸다. 그 맛을 다시 한번 혀끝에 올려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지혜와 재희,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마주친 밤
지혜는 다시 나타났다.
"안녕, 민수."
그녀는 맥주 한 캔을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세월이 지났지만, 그녀의 목덜미는 여전히 같은 향을 품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이혜 씨, 왜 이런 곳에...?
그냥... 지나가다가.
거짓말이 너무 투명했다.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지나가다 들른 게 아니라, 다시 섞여들고 싶어서 왔다는 걸.
"그날... 미안해." 그녀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 가볍게 흘러넘쳤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다. 대신 나는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작은 흉터를 바라봤다. 그것은 내가 아는 흉터였다. 내가 만들어준 흉터였다.
용서는 새로운 지배의 시작
재희는 다른 사례였다.
그녀는 민서의 가장 친한 친구와 누웠다. 그날 이후로 민서는 재희의 모든 것을 기억했다. 재희가 어떤 색깔의 립스틱을 바르는지, 어떤 향수를 뿌리는지, 어떤 목소리로 누군가를 부르는지까지.
그리고 3년 후, 재희는 다시 돌아왔다. 민서는 그녀를 맞았다.
너는 왜 다시 나타났어?
네가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용서? 민서는 속으로 웃었다. 용서라는 것은 결코 끝나지 않는 지배의 시작이다. 재희는 평생 민서의 눈에 떠오르지 않는 곳마다 민서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었다. 이제 재희는 누군가와 누워도, 민서의 눈동자 속에 새겨진 자신의 모습을 피해갈 수 없었다.
왜 우리는 다시 돌아가고 싶어질까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외상-중독'이라고 부른다. 배신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우리는 그 고통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진다. 그 고통 없이는 더 이상 나는 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배신이 새겨놓은 공허를 다시 채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공허를 다시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공허를 더 깊게 파는 것뿐이다.
마지막 질문
그녀가 다시 왔을 때, 너는 그녀의 배신을 네 피부에 새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