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무 잘못이 없대"
나는 아직도 그 말을 잊지 못한다.
휴대폰 속 사진 한 장. 검은색 미니원피스에 맨발로 서 있던 그녀, 지하 주차장 불빛 아래서 담배를 문 채 웃고 있었다. 연기를 내뿜는 그 입술이, 내 남자의 목덜미를 한 번 더 핥았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그날도 똑같았다. 나는 연거푸 문자를 보냈다.
왜 너는 아무 잘못이 없대?
답은 없었다. 대신 고장 난 그의 시계가 책상 위에 굴러 다녔다. 11시 17분에서 멈춘 시곗바늘이, 그가 그녀의 집을 나선 시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시곗바늘을 빼내 손가락으로 굴려봤다. 뾰족한 바늘이 살을 찌를 때까지.
심장 밑에서 꿈틀거리는 것
그녀는 정말 무죄였을까. 아니면 나도 그녈 원했다는 사실이 무서웠을까.
숨겨놓았던 욕망은 이렇게 생겼다. 뭉개진 연지처럼 퍼지는 분노와, 끈적한 질투 사이에서 뒤틀리는 꿈. 내 남자가 아닌 그녀의 어깨를 내가 문지르면 어떨까.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미소 지으면 어떨까. 끔찍한 발상이지만, 그 발상 속에서 나는 오르가즘보다 더 끔찍한 평온을 느꼈다.
나는 그녀를 미워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상상한다. 그녀를 통해 나를 미워한다.
지하철 4호선, 23시 58분
지혜는 매일밤 똑같은 노선을 탔다. 종로3가에서 성수까지, 광장 앞 2번 출구에서 내린 뒤 300미터 걷고 들어가는 원룸. 그녀가 사는 곳이다. 올해 초, 지혜는 남자친구에게서 차였다. 사유는 단순했다. ‘내가 다른 사람 좋아해졌어.’
지혜는 그녀를 찾아갔다. 당연히 말다툼이 벌어졌다. 하지만 끝에서 지혜는 물었다.
너도 나를 끌리게 했던 적 있어?
…잠깐이었지만, 있었어.
지혜는 그 말에 홀린 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키스는 아니었다. 단지 머리카락 냄새를 맡는 것처럼, 그녀의 귓불을 살짝 베었다. 그녀는 놀라 뒷걸음질 쳤고, 지혜는 씩 웃으며 돌아섰다.
그날 이후 지혜는 매일 밤 그녀 집 앞을 지킨다. 인상 찌푸리며 걷는 그녀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SNS에 올리지 못한 사진들로 가득 채운다.
난 그녀를 사랑한다. 내 남자를 뺏은 그녀를, 그래서 나도 뺏고 싶다.
무도회장의 그림자
서른두 살, 은행원 수진. 그녀는 남편이 바람난 여자의 이름조차 모른다. 다만 3월 15일 새벽, 남편이 가져온 양말 한 켤레를 발견했다. 연한 베이지색, 발뒤꿈치에 붉은 글씨. 레일라.
수진은 레일라를 상상했다. 붉은 매니큐어를 바른 발가락,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무릎. 그리고 그녀는 놀랍게도 자신이 그녀를 연기하는 상상을 즐겼다. 남편이 돌아오면, 그녀는 베이지 양말을 신고 거실로 나선다. 레일라의 목소리로 말한다.
오늘도 당신이 좋아하던 자세로 했어.
남편은 얼굴이 하얘지며 대답한다.
…미안해.
수진은 레일라로서 그를 괴롭힌다. 레일라로서 그를 끌어안는다. 그 과정에서 수진은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게 된다. 어느 날 밤, 레일라의 이름으로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또 보고 싶어.
답장이 왔다.
나도.
금기의 뒷골목
왜 우리는 상대를 원하는가. 단순한 복수심, 질투, 그 이상이다. 금기는 늘 거울이다. 내 안에 있는 나를 보여준다. 내가 바람피운 여자를 바라는 순간, 나는 사실 나 자신의 욕망을 바라고 있다.
심리학자 칼라 로렌스는 말한다. ‘집착은 타인을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려는 시도다.’ 우리는 상대를 통해 나를 시험한다. 내가 얼마나 타락할 수 있는지, 얼마나 더럽혀질 수 있는지.
그래서 우리는 상대를 상상한다. 그녀가 나를 원한다고, 그녀도 나를 괴롭히고 싶다고. 그 상상 속에서만 우리는 상처를 조율한다. 범인도 피해자도 아닌, 가능해진 나를.
당신은 누굴 더 원하는가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누구를 떠올리고 있는가.
바람피운 여자일까. 아니면, 그녀가 된 당신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아무도 없을 거다. 하지만 당신은 벌써 손잡이를 돌리고 있다. 밖에는 아무도 없지만, 당신 안에는 그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