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항상 반만 줘.”
밤 11시 47분,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은 아내가 술 한 모금을 홀짝이며 말했다. 투명한 잔 속 맥주 거품이 터지는 소리마저 선명했다. 나는 TV 화면에 눈을 떼지 않았다. 아내의 시선이 침대 곁 스탠드에서 거실 창문으로 흘러갔다. 불 꺼진 거실 너머로 402호가 보였다. 희미한 엘리베이터 조명이 흘러나와 그 집 거실 벽을 간신히 드러냈다. 그날 이후 아내는 아내 같지 않았다.
샤워 후 돌아오면 침대 한쪽이 움푹 패어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이 베개 위에 떨어져 있었는데, 길이가 아내 것보다 짧았다. 밥상에서 아내는 숟가락을 들었다가 공중에 멈추는 일이 잦아졌다. 시선이 식탁 위가 아니라, 창문 너머 402호를 향했다. 나는 휴대폰 사진 폴더에 ‘창문’이라는 이름으로 327장을 쌓았다. 사진마다 아내의 뒷모습만 담겼지만, 나는 아내의 눈이 향하는 곳을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받는 자격이야.
아내의 눈에서 나는 이미 자격을 잃었다.
민서의 일기—2022년 3월 12일, 토요일, 맑음
오늘도 402호 불이 켜졌다. 22시 03분. 창문을 열면 멀리서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가 조용해진다. 남편은 부산 출장 사흘째. 나는 소파에 누워 맞은편 402호를 바라본다. 커튼이 살짝 열렸다. 티셔츠를 벗는 손이 느리다. 왼쪽 어깨에 타투가 있다. 작은 별 세 개. 180cm쯤 될 것이다. 남편은 175cm다.
23일째 이 집을 지켜본다. 어젯밤엔 그가 전화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 오늘은 좀 늦을까?” 목소리가 낮고 쉰 것 같았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다. 승준이는 집에 오면 노트북만 연다. 지난주엔 “오늘도 늦어” 한마디만 남기고 새벽 두 시에 들어왔다. 나는 그날 소파에 앉아 402호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렸다.
402호 실루엣
4월 3일 새벽, 아내가 몰래 일어났다. 3시 21분. 나는 눈을 감은 척 숨을 죽였다. 아내는 맨발로 거실로 나갔다. 침대 매트리스가 살짝 올라섰다가 내려앉았다. 고요한 발소리가 창문 쪽으로 향했다. 휴대폰 조명이 한 번 깜빡였다. 아내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잠시 후 402호 불이 켜졌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신발장 뒤에 몸을 숨기고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한참 말이 없다가, 한 마디 떨어졌다.
“오늘은… 괜찮을까요?”
402호 불이 꺼지지 않았다. 아내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천천히 침실로 돌아왔다. 나는 더 이상 복도에 있을 수 없어서 신발장 뒤로 들어가 숨었다. 아내가 방문을 닫는 소리가 나자, 나는 신발장에서 나와 402호를 바라봤다.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창문 너머로 건너간 마음
사랑이 반쪽이면, 사람은 나머지 반을 어디서든 채우려 한다. 아내는 나에게서 받지 못한 반쪽을 402호에서 찾았다. 나는 아내에게 주지 못한 반쪽을 아내의 뒷모습에서 찾았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반쪽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창문은 경계다. 안과 밖,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 사랑과 욕망.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지만, 그래서 더 강렬하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멀어진 마음. 그 마음은 창문 너머의 불빛에 몸을 맡긴다.
5월 8일, 어버이날
아침 일곱 시, 아내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나는 집을 나섰다. 402호 앞 복도에 섰다. 문 앞 우편함에 ‘김현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편함 위로 조그만 CCTV가 있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때 402호 문이 살짝 열렸다. 틈새로 남자의 눈이 보였다. 우리는 3초 정도 마주쳤다. 문이 닫혔다. 나는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밤 11시 54분. 아내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나를 바라봤다. TV는 꺼져 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너는 항상 반만 줘.”
나는 대답 대신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아내의 손은 차가웠다. 창밖으로 402호 불이 꺼졌다. 아내는 고개를 돌렸다. 나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402호는 이번엔 정말 어두웠다. 아내가 나를 봤다. 나도 아내를 봤다. 우리는 서로의 반쪽을 찾으려 했지만, 그 반쪽은 이미 창밖으로 사라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