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냥 여기 있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새벽 2시 47분. 인사동 골목 안, 간판도 없는 자그마한 술집. 테이블 위에 흩어진 메모지들, 연필 자국이 선명한 손끝. 마지막 맥주 두 잔이 땀방울을 맺고 있었다.
"오늘은... 진짜 그냥 있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민서는 29살, 나와 같은 회사 다른 팀. 늘 두 발로 단단히 땅을 박고 서 있던 사람. 술 마시면 눈빛이 흐려지는 대신 오히려 또렷해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민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내 어깨에 기대 잠든 머리카락이었다. 손끝이 미끄러지자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나는 뭔가 단단한 게 목끝에서 맺히는 걸 느꼈다.
문이 열리는 소리
3시 15분. 종업원이 눈치를 주며 불을 껐다. 민서가 눈을 떴다.
"나 오늘... 민혁이랑 있다가 왔어."
"민혁이?"
"응. 오랜만에."
"그래서?"
"그래서... 나 지금 가야 해."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코트를 걸치고, 가방을 들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나는 창밖을 봤다. 민혁이 문 앞에서 서 있었다. 손에 작은 우산 하나.
민서가 달려가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가는지, 내가 아는 그녀의 손가락이 어떻게 낯선 손에 길들여지는지.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차가웠다.
허공의 대답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1년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테이블 위에 민서가 남긴 립스틱 자국, 맥주 잔에 남은 그녀의 입술 모양.
"너는 나를 깨뜨리지 않을 것 같아."
그녀가 한 번 말했던 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그녀를 보호하려 했는데, 그녀는 부서지기를 원했던 거라는 걸. 안전함이 지루함이 되고, 편안함이 감옥이 되는 순간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깨달음의 순간
그날 밤,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선택받지 못하는 고통보다, 선택하는 순간의 떨림을 더 두려워한다.
그래서 민서는 떠났던 거야.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그녀는 단지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사실은 그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나를 버릴까 봐."
그 불안이 오히려 전율이었다는 걸. 민서가 떠난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원한 건 끝내는 게 아니라, 끝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아직도 그 자리에
가끔 그 술집에 간다. 문이 열릴 때마다 민서가 들어올 것만 같아서. 그녀는 없지만, 내가 머물렀던 자리는 아직 그대로다. 테이블 위에 아무도 못 본 척 놓여 있는 메모지 한 장.
"우리, 그냥 여기 있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 말이 오늘도 내 귓가에 맴돈다.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떠나던 밤, 나는 그 끝을 확인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