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지하게 말하는데, 너랑 안 맞는 것 같아."
민서는 내가 허겁지겁 건넨 맥주잔을 흘긋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건넨 맥주를 안 받았다. 찬물 끼인 캔이 내 손에 떨려서 쇠파이프처럼 차갑게 울렸다.
그날이 2023년 8월 14일, 대학 옥상. 우리는 매년 같이 맥주 마시던 그날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오늘은 꼭.
그녀의 입술이 닿기 직전
민서는 웃으며 ‘올해 내 생일 선물 뭐 줄 거야?’ 하고 물었다. 나는 그 웃음에 속았다. 그렇게 쉽게 내 욕망이 튀어나올 줄 알았다면, 입을 꾹 다물었을 텐데.
그래, 고백은 언제나 계획보다 한 발 늦게 튀어나온다.
"민서야, 나…"
"뭐?"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달빛이 그녀 턱선을 은백색으로 훑고 지나갔다. 나는 눈을 감고 키스했다. 0.8초. 세상에서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끔찍한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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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이야, 너무 늦었잖아.’
민서는 입술을 씻어내듯 손등으로 문질렀다. 나는 그 손놀림 하나에 3년이 순식간에 지워지는 걸 봤다.
"우리 그만… 만나자."
"만나는 게 아니라, 연락 끊자는 거지?"
그녀는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꺼내 우리가 찍은 2,847장의 사진을 하나씩 휴지통으로 떨궜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가 부산 여행에서 찍던 바다 사진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욕망은 언제나 우정의 독이었다
우리는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가면 안 된다’는 집착으로 서로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키스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나는 사실 그녀의 ‘사람됨’이 아니라 ‘내 편’이라는 독점이 갖고 싶었다는 걸.
민서는 항상 연애 얘기를 풀어놓을 때마다 "너는 다르니까" 라며 나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특별함이 사랑이라 착각했다. 사실 그건 ‘남자친구보다도 너’라는 권력의 다른 말이었다.
실제 같은 이야기 두 편
하진 & 유나, 5년 차 베프
하진은 유나가 새로 생긴 남자친구를 소개한 그날 밤, 결국 술병을 깨뜨렸다. 유나는 눈물 콧물 섞인 얼굴로 “왜 네가 더 화냐”고 했다. 하진은 “그래, 나는 너의 눈물도 독점하고 싶었어” 라고 속으로 외쳤다. 그날 이후 둘은 ‘절친→라이벌’로 전락했다. SNS 차단당한 지 600일째.
승우 & 도현, 7년 절친
승우는 군대 제대 후 목욕탕에서 도현의 등을 밀어주다가 키스했다. 도현은 멍하니 바라다가 “야, 이거… 실수 맞지?” 라고 웃으며 넘겼다. 그날 이후 도현은 승우 문자를 ‘읽씹’했다. 7년이 7초 만에 사라지는 걸 승우는 남자 목욕탕 타일 냄새에 묻혀 기억한다.
금기는 왜 더 달콤한가
심리학자 알렌스워스는 ‘금기 욕망의 뒤틀린 달콤함’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먹을 수 없는 열매가 제일 달다고 생각한다. 사실 열매가 아니라 **‘길들여진 관계를 부수는 쾌감’**에 홀린다.”
우리는 이미 완전한 것을 더 완전하게 만들려 해서가 아니라, *‘깨지는 순간의 날카로운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닐까.
마지막 질문, 당신에게 던진다
만약 그날 밤, 민서 대신 당신이 거기 있었다면.
당신은 그녀의 입술을 피했을까, 아니면 나처럼 끝까지 간절히 닿았을까?
그리고 그 키스가 당신의 3년, 혹은 10년을 날려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면?
그래도 입맞춤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