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이 떨어지는 카페 창가. 나는 아직 젖은 머리카락을 털지도 않은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5분 늦은 그가 들어올 때, 나의 몸은 먼저 반응했다. 검은 코트 아래로 살짝 드러난 목덜미에 맺힌 물방울 하나, 그것만으로도 내 안에 숨겨둔 어떤 것이 꿈틀거렸다.
"미안, 지하철이..." 그의 숨결이 닿는 순간,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이 볼에 붙은 채 말하는 그는, 내가 떠올리던 지훈이 아니었다. 내가 떠올리던 지훈은 항상 말끔했고, 향긋한 드라이어링 냄새를 품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코트에서 나는 비 맞은 섬유와 담배 냄새가 섞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냄새를 맡았다.
그날 밤,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그의 코트 주머니를 들여다봤다. 티슈 한 장, 사용한 영수증, 그리고 낯선 향수 냄새.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조용한 파국을 알렸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은 내가 사랑한 것이 그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어떤 형체였다는 것을.
우리는 사실 누군가의 살아 있는 육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나를 채운다고 믿었던 허공의 모양을 사랑하고 있었을 뿐. 키 180cm, 눈웃음이 예쁘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는 사람. 이 모든 조건은 결국 내가 만들어낸 공식이었다.
그러나 그 공식 안에 숨겨진 건 끔찍한 욕망이었다. 내가 그를 통해 채우고 싶었던 것은 사실, 내가 스스로 채우지 못한 구멍들이었다. 혼자 먹는 저녁, 혼자 보는 영화, 혼자 걷는 밤거리. 그 모든 공허함을 그가 대신 채워주길 바랐다는 것을, 나는 그날 깨달았다.
사례 1: 유리가 만든 '상현'
32세 광고회사 AE 유리는 처음 만난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상현이가 명함을 내밀 때 손가락이 예뻤어. 손톱 모양이 딱 내가 좋아하는 대로였고, 손등에 힘이 들어간 게... 그게 너무 섹시하더라고."
그녀는 상현이 그녀가 좋아하는 노란 장미를 들고 온 날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상현은 그녀의 SNS를 역추적해 그녀가 3년 전 올린 노란 장미 사진을 찾아냈던 것이다. 두 번째 데이트에선 그녀가 언급했던 영화관을 예약했고, 세 번째에선 그녀가 좋아하는 와인을 골랐다.
"그런데 네 번째 데이트에서, 웨이터가 와인을 엎질렀을 때 걔가 진짜 화를 냈어. 목에 힘주어지면서 여기..." 유리는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여기 보라색 혈관이 드러나는 거 있잖아. 그게 너무 낯설게 보이더라고. 내가 만들어낸 상현은 절대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거든."
사례 2: 준호가 숨긴 '진짜 나'
29세 개발자 준호는 말한다. "나 여자친구한테 늘 차분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안감에 휩싸여. 그녀는 내가 취미로 요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한 번 만든 파스타 사진이 돌아다니는 거야."
준호는 그녀가 잠든 새벽에 종종 화장실에 앉아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녀는 내가 감정 표현이 서툰 따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냥 표현하는 게 귀찮은 거야. 따뜻한 게 아니라, 그냥 게으른 거지."
우리는 사실 완벽한 퍼즐 조각을 찾는 게 아니었다. 완벽하지 않은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자신을 숨기려는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 사람을 수정하고 변형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심리학자 도널드 윈니캇은 '허위 자아'라는 개념을 말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건 실제 대상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대상의 내면 표상이다. 현실의 남자가 이상적인 타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상적인 타입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나의 결핍이 투영된 그림자일 뿐.
그날 밤, 지훈은 내 집에 머물렀다. 그가 잠든 사이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봤다. 손가락 끝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은 생각보다 굵고, 때로는 딱딱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내가 만들어낸 '지훈'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부드럽고 향긋했을 텐데.
나는 그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땀 냄새, 비누 냄새, 그리고 무언가 모를 남자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나는 결국 이 냄새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불완전하고, 내가 만들어낸 환상과는 다른, 실제 남자의 냄새를.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은 과연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이 당신이 만들어낸 허구를 채워주지 못해서 화가 나는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짜 남자, 누군가의 가짜 여자를 만들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가짜를 깨뜨리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진짜 사랑의 문턱에 다다르는 것일지도.
그날 이후, 나는 지훈의 실루엣이 흔들릴 때마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흔들림 속에서 진짜 지훈이 숨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진짜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는 조용히 마음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