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원한다면, 나를 발로 밟아도 돼"
차갑게 식은 아침 7시 47분. 10년을 함께한 연인 서연이 화장실 문 앞에 말없이 무릎 꿇었다. 그녀의 새 남자친구는 아직 잠든 듯, 현관에 벗어둔 남성용 운동화를 보니 어제 밤 이 집에서 잤다는 게 실감난다.
서연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발가락 하나하나에 입 맞추며 중얼거렸다.
아직도 사랑하니까 아직도 차마 못 떠나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빈속의 들끓는 것
이건 사랑이 아니야. 알면서도 왜 난 여기 있는 거지.
서연은 알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의 심장이 뛰는 이유도, 그녀가 숨을 헐떡이는 이유도 자신이 아니라는 걸. 하지만 돌아서면 모든 게 공허해질 것 같았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주전자 속 물처럼 한방에 식어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했다. 눈을 감고 억지로라도 맛보는 더러운 달콤함.
"사람은 왜 끝을 맛보지 못하면 미친 듯이 더 달라붙는 걸까."
사례 1: 준호, 34세, 광고 대행사 AE
준호는 전 여자친구 혜지의 결혼식장 로비에 몰래 숨어 있었다. 백화점 신부 대기실에서 쓰던 그 양복장. 문틈으로 보이는 혜지의 눈부신 웨딩드레스. 준호는 그녀가 한 손으로 든 부케를 건네달라며 내밀던 순간을 기억했다.
"이거... 내가 준 거야."
혜지는 놀라 뒤돌았다. 준호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하나만 가져도 돼 향수 냄새라도 너가 입은 드레스 치맛자락 끝이라도
혜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작은 손가락으로 단 한 송이만 꺾어 건넸다. 민들레처럼 흩날리는 작은 꽃잎. 준호는 그걸 입에 넣고 씹었다. 쓴맛. 하지만 끝내야 할 구역질 나는 달콤함.
사례 2: 수진, 29세, 대학원생
수진은 전 남자친구 재민의 새 여자친구 인스타그램을 밤새 들여다보다 알게 됐다. 그녀가 재민의 반려견 ‘별이’를 산책시키는 사진. 별이는 수진과 4년을 함께 키운 강아지였다.
수진은 새벽 2시에 재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별이가 너무 보고 싶어요 한 번만... 산책이라도 같이 해도 될까요
재민은 답이 없었다. 대신 새 여자친구가 답장을 보냈다.
별이는 이제 제 강아지예요. 산책도 제가 할게요.
수진은 그 자리에서 울었다. 그리고 새벽 4시, 재민 아파트 현관 앞에 무릎 꿇었다. 별이가 문 앞에서 낑낑거리며 수진 냄새를 맡는 게 들렸다.
그래도 나는 네 주인이야. 그러니까... 문을 좀 열어줘.
우리는 왜 그토록 낮은 곳에 몸을 던질까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사람은 ‘종결’이라는 단어를 두려워한다고. 특히 강렬한 애착이 형성된 관계에서는 그 종결이 ‘자기 몸의 일부를 날려버리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그래서 발생한다. 강박적 복원욕구.
- 단 한 번의 터치라도 되찾고 싶은 욕망
- 단 한 방울의 애정이라도 빨아먹으려는 갈증
- 결국엔 상대의 발가락마저도 자신의 모든 걸 맡기려는, 이기적인 자기증오
"당신이 떠난 뒤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의 발톱 밑에, 당신의 숨결이 헤집는 침대 시트 사이에."
발끝 위의 나
서연은 서현이의 발가락 위로 얼굴을 내려놓았다. 아직 따뜻한 발바닥. 10년 전 처음으로 그녀의 발을 잡았을 때처럼. 하지만 지금 그 손은 떨리고, 그 눈은 젖어 있었다.
서현이는 말했다.
이제 그만해 이건 예의가 아니야
서연이 대답했다.
예의 따위야 나는 그냥 너가 필요해서
그 순간, 서현이는 천천히 발을 뗐다. 차갑게 식은 타일 위로 서연의 뺨이 닿았다.
마지막 질문
당신도 누군가를 끝내지 못해, 그의 발끝 아래로 기어들어간 적은 없나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