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나를 만나려면 이건 지켜야 해”
그녀는 담뱃연기를 한 모금 뿜으며, 조건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나는 술집 화장실 거울을 보며 숨을 죽였다.
1. 화요일엔 절대 만나지 않는다. 그 날은 전 남자친구 생일이니까.
2. 내 집 근처로 오지 마. 동네 사람들이 너를 보면 혼잣말 할지도 몰라.
3. 나한테 고기를 권하면 안 된다. 나는 그날의 죄책감을 지겹도록 챙겨 먹었으니까.
그리고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게 싫으면 나랑 안 만나면 돼."
다이얼이 돌아가는 순간, 불빛이 꺼졌다
그때는 몰랐다. 조건이란 건, 누군가에게 굴복하는 자의 목에 거는 목줄이라는 걸.
조건은 위선이었다. 내가 ‘이해한다’고 말할수록, 그녀의 눈빛은 더 차가워졌다. 술잔을 채우며 그녀가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좋아하니까, 너는 여기 있겠지?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미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언젠가, 이 순간을 거꾸로 돌려놓는 날이 올 거라고.
8개월 후, 영등포구 커피숍
"상우야, 너도 알잖아. 나는 이제 달라."
채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편의점 알바 끝나고 온 그녀의 손가락엔 아직도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내 앞에 앉아, 예전에 내가 들었던 그 말을 꺼냈다.
실은… 나 만나면 너도 몇 가지만 지켜줬으면 해.
1. 내가 연락하기 전까진 절대 먼저 카톡하지 마.
2. 술은 네가 먼저 권하지 마. 내가 마시고 싶을 때만.
3.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만났는지, 아는 사람한테 절대 말하지 마.
채원은 눈을 피했다. "이게 싫으면… 나랑 안 만나도 돼."
나는 미소를 지었다. 8개월 전의 나와 똑같은 미소였을까? 채원의 눈에서, 그때 내가 느꼈을 불안과 굴욕이 스며나온다.
괜찮아… 그래도 좋아하니까.
서울역 뒷골목 모텔, 새벽 2시
둘째 사례. 준영과 수진. 둘 다 우리 회사 팀 동료다.
야근 끝나고 수진이 모텔 카드키를 준영에게 내밀었다.
여기서 자고 가. 나는 새벽 4시에 와서 너랑 2시간만 있을게.
준영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그 시간 전까지… 뭐 해?"
수진은 태연했다. "TV 보든 뭐 하든 네 맘일 뿐이지. 난 그냥 필요할 때만 올 거야."
준영은 하루 종일 회의실에 혼자 남아 노트북을 두드렸다. 수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는 벌써 식은 피자를 뜯고 있었다. 수진은 그의 턱을 잡아 일으켰다.
오늘은 샤워했겠지?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의 목에 입맞춤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24시간 남짓 남은 약간의 권력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는 왜 이런 불균형을 원하는가
‘조건이 있어’는 실은 ‘내가 너를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너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의 변형이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부적합한 가치 평가’*라 부른다. 타인의 욕망을 조종함으로써 스스로의 낮은 자존감을 올리는 방식. 하지만 그 뒤엔 더 어두운 것이 도사린다.
권력의 환각. 나는 너를 거절할 수 있지만, 너는 나를 거절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갈취되는 전율. 그 전율은 마치 중독처럼, 조건을 걸던 사람이 조건을 받는 쪽으로 서서히 뒤바뀌도록 만들었다.
조건의 피라미드가 무너지는 순간
채원이 나를 다시 만난 지 3주째, 그녀는 조건을 흔들었다. "오늘은… 너가 먼저 연락해도 돼."
나는 조용히 답했다. "싫어.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차례 였다.
당신은 지금 누구에게 조건을 주고, 누구에게 조건을 받고 있나? 그리고 그 불균형이 무너지는 날, 당신은 과연 승자일까, 아니면 그때야 비로소 진짜로 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