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리기 직전
금요일 밤 11시47분, 복도 끝 전등 하나만 남겨둔 채 지훈은 문 앞에 선다. 손에는 편의점 봉투, 안에는 맥주 두 캔과 담배 한 갑. 그는 열쇠를 꽂지 않는다. 이미 백 번도 넘게 왔지만, 항상 먼저 두드린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지아가 문 안쪽에서 손을 얹으면, 살이 스칠 때마다 전기가 온다. 한참을 그 떨림 위에서 버틴다. 숨소리만 겹친다. 문이 열리면 눈빛이 먼저 부딪힌다. 그 눈빛은 이미 화를 넘어선, 말할 수 없는 것의 불꽃이다.
싸움은 접촉이다
지아는 잠옷 차림으로 현관에 선다. 불 켜지지 않은 거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살아 있다. 지훈이 들어서며 말을 내뱉는다.
“오늘은 네가 먼저 지를래, 내가 먼저 지를래.”
말은 싸움처럼 들리지만 떨림이 섞인다. 지아는 대답 대신 냉장고 문을 연다. 시원한 공기가 나온다. 지훈이 다가와 뒤에서 문을 닫는다. 손등이 손등을 스친다. 한 치도 안 되는 틈, 그 틈에서 숨결이 섞인다. 지아는 물컵을 든다. 지훈은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잡고 맥주캔을 끼운다. 차가운 알루미늄이 뜨거운 피부를 때린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순간, 말은 필요 없다.
거실 바닥에 앉은다. 맥잔 대신 캔째 입을 댄다. 첫 모금에서 숨이 차다. 지아가 먼저 말한다.
“지난주에 했던 말, 아직 화나?”
“응, 더 화나. 그래서 왔지.”
화해가 아닌, 더 큰 불씨를 찾으러 온 것이다. 지훈이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다. 거품이 입가에 남는다. 지아는 손등으로 닦아준다. 그 손길이 멈추지 않는다. 지훈이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서로를 향한 시선은 이미 싸움의 시작이자 끝이다.
싸우기 위한 몸짓
이들의 싸움은 말싸움으로 시작해 몸싸움으로 번진다. 하지만 그 몸싸움은 서로를 놓지 못하는 춤이다. 지훈이 먼저 일어선다.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운다. 지아는 소파에 몸을 기댄다. 지훈이 다가와 무릎을 꿇는다. 두 손으로 지아의 얼굴을 감싼다. 손바닥이 볼을 덮는다. 체온이 전해진다. 지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지훈이 속삭인다.
“여기가 아프다.”
손끝이 지아의 가슴에 닿는다. 맥박이 뛴다. 지아는 지훈의 손을 잡아 뗀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잡는다. 이번엔 더 세게. 손톱이 살을 파고든다. 지훈이 미소 짓는다. 이제 시작이다. 지아가 먼저 밀친다. 지훈이 넘어지지 않게 벽을 짚는다. 그 틈에 지아가 다가와 이마를 부딪힌다. 둔탁한 소리. 그러나 아프지 않다. 눈앞이 흔들린다. 지훈이 지아의 허리를 잡는다. 두 손으로 감싸 안는다. 지아는 팔을 뻗어 지훈의 목을 감는다. 서로를 가까이 끌어당긴 채 숨을 몰아쉰다. 이건 싸움의 시작이다. 하지만 누구도 놓지 못한다.
전쟁의 끝에서
싸움은 새벽 3시쯤 끝난다. 맥주 캔 여섯 개, 담배 두 갑, 그리고 서로의 눈물 한 바가지. 마지막엔 지아가 먼저 말한다.
“미안하다.”
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숙인다. 지아의 품에 안긴다.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누운다. 이불 대신 서로의 팔을 덮는다. 눈을 맞춘다. 지훈이 말한다.
“다음 주엔, 뭐로 싸울까.”
지아가 웃는다. 눈물이 말라가는 뺨에 미소가 번진다.
“그때 가서 정하자.”
그리고 입을 맞춘다. 짧고 뜨겁게. 싸움으로 시작해 끝난 사랑은, 다시 싸움으로 이어질 사랑이다. 문 밖으로 나가는 지훈의 발걸음이 멀어진다. 지아는 문에 기댄다. 문고리를 잡는 손이 아직도 떨린다. 다음 주 금요일, 다시 타오를 눈빛을 기다리며.
문이 닫히고, 긴 밤이 시작된다. 싸움은 사랑의 다른 언어다. 우리는 그 말을 배우기 위해, 매주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