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10년간 부른 단어는 사랑이었지만, 실은 제 이름이었다

그가 고른 속옷, 통장, 식단까지. 10년 사이 그는 나를 위해 모든 걸 통제했다. 처음엔 사랑처럼 보였던 그 가느다란 선이 언제부터 내 목줄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권력의 얼굴관계 통제집착 심리은밀한 금기

"오늘은 검은 팬티 입지 마"

"검은색은 네 분위기에 너무 가혜." 재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회색 빛 아침, 침대 옆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남자. 그는 이미 내 옷장 다섯 칸을 색깔별로 정리해 놓았다. 화요일마다 누드 핑크 브라, 목요일엔 베이지 실크 팬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라색 레이스로 바꿔 입었다. 그 순간, 이게 사랑이겠지 하고 속삭였다.


욕망의 해부

지금 돌아보면, 그건 애정이 권력의 탈을 쓴 순간이었다. 재우는 내가 입고 싶은 걸 대신 ‘선택’해주었고, 나는 그 선택을 ‘허락’이라 착각했다. 그때 내가 몰랐던 건, 통제는 대부분 ‘널 위해서’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것.

내가 왜 검은색을 포기했을까? 단순히 색깔 때문이 아니었다. 거절하면 그가 서운해할 것 같았다. 서운함이 곧 차가워짐으로 이어질까 봐. 그러니까,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사랑의 가장 어두운 변주다.


사실, 그건 연애 말고 훈련이었다

지혜, 32세, 마케팅 대리 지혜는 10년 전, 대학 3학년 도서관에서 민석을 만났다. 민석은 그녀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비건 도시락을 싸줬다. 콩고기 스테이크, 퀴노아 샐러드, 아몬드 요거트. 한입 먹자마자 민석이 속삭였다.

"야채가 네 피부를 더 맑게 할 거야."

처음엔 감동이었다. 민석은 그녀의 월급 통장을 관리해주겠다고 제안했고, 그녀는 통장 비밀번호를 사랑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2년 뒤, 그녀는 회식 중 새우튀김 한 입 먹고 민석에게서 차가운 메시지를 받았다.

"너 냄새나. 샤워하고 오늘은 안 볼래."

그날 이후 지혜는 새우, 돼지, 닭고기를 모조리 끊었다. 10년이 흘러, 지혜의 인스타그램 피드엔 여전히 민석이 고른 샐러드 사진만 있다. 댓글 400개 중 399개는 “우와 목표 달성”이다. 하나 남은 댓글은 지혜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남긴 거다.

"아직도 그 새X 때문에 굶어 죽는 거야?"


수진, 35세, 번역사 수진은 매일 아침 7시 반에 정확히 카톡 한 통을 받는다.

"오늘 누구 만나?"

수진은 남자친고 ‘준’에게 일정표를 보낸다. 가끔 점심 약속이 생기면 준이 먼저 말한다.

"그 사람 남자야? 그럼 30분까지만."

처음엔 질투로 해석됐다. 3년 뒤, 준은 수진의 노트북에 원격 소프트웨어를 깔았다. 수진이 모르는 사이. 준은 그녀가 번역 중인 원고를 실시간으로 본다. 오타가 뜨면 바로 메시지가 온다.

"라인 17, 오타. 너 느려지고 있어."

수진은 처음엔 ‘감사하다’고 답장했다. 누군가 내 삶을 실시간으로 감시해준다는 게 마냥 설레었으니까. 어느 날, 그녀는 장례식장에 가야 했다. 고등학교 동창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 주차장에 도착하자마자 준 전화가 왔다.

"왜 내가 모르는 장례식 가? 너 오늘 우리 상사 만나는 거 아니지?"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심리학자 에스트 페렐은 말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관계를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통제당했다.” 부모는 네가 추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고, 선생은 네가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니까 사랑은 곧 통제였다.

오래된 두려움은 새로운 통제를 향기로운 꽃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통제를 집착으로 포장한 헌신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을 끊으면, 세상이 갑자기 너무 넓어진다. 넓어지면 외로워진다. 외로움보다 감옥이 나은 사람도 있다. 아니, 많다.


그대, 이름을 불러도 되는가

지금 이 순간, 누군가 네가 쓰려는 메시지를 먼저 보내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네가 누군가의 옷장을 색깔별로 정리해 놓았는지도.

당신은 지금 이 글을 읽으며 떠오른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당신의 이름을, 아니 당신이 그 사람의 이름을 지금도 속삭이고 있다면, 한번 물어보자. 오늘 우리 사이에 남은 건 누가 누구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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