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게 식은 맥주잔 위로 스민 숨결
새벽 1시 47분, 종로 뒷골목 포장마차. 유리잔 맞은편에서 재우가 한 모금 남은 맥주를 들이켠다.
“야, 너 오늘도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지?”
재우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손에 든 병따개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이젠 익숙해진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지금은 그 뛰는 소리를 계산해서 삼킨다. 숨긴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래, 우리는 그냥 친구지. 아무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아무 것도.
난 왜 그의 손끝 하나에도 굴복할까
친구라는 단어는 빈틈 없이 날 조여 온다. ‘친구’는 손을 잡지 않는다. ‘친구’는 새벽 3시에 함께 들어가도 문 앞에서 헤어진다. ‘친구’는 술 취해서 바닥에 앉아도 서로의 무릎 위에 머리를 기대지 않는다.
나는 너를 친구라 부르지만, 그 말이 입안에서 씹히는 순간마다 단맛이 돌았다. 단맛 뒤에 스며드는 독처럼.
우리 사이에 맺어진 ‘친구’라는 계약서. 그 계약서는 한 치의 오타도 없이 잘 짜여 있다. 요점은 간단하다. 욕망을 숨기고, 육체를 억제하고, 감정은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고장 난 온도계처럼 36.5도를 유지하라는 말이다.
실화처럼, 혹은 거짓말처럼 들릴 두 개의 이야기
1. 유나의 2년
유나는 29세 UX 디자이너다. 상수동 모임에서 처음 만난 ‘그’는 팀원의 친구였다. 첫 만남 후로 매주 수요일 밤, 그는 유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심심하다’는 말 한마디에 유나는 11시 반에 뚝딱거리며 옷을 갈아입었다.
차 안에서는 언제나 친구들 얘기가 먼저 나왔다. 누가 누구랑 싸웠고, 누가 회사 때렸고. 유나는 그 잡담 사이에 끼어 웃으며, 그의 손가락이 변속 레버 위에 올라올 때마다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한 번은 그가 “야, 너 졸려?” 하고 유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유나는 그 손길이 머리에서 뺨으로 흐르는 1.7초 동안 눈을 꼭 감았다. 잠든 척.
그날 이후, 유나는 스스로를 ‘친구’라 부르기 시작했다. 친구라는 말이 무기였다. 무기이자 방패였다. 그래서 2년이 지나도록 고백은 없었다. 유나는 결국 그가 다른 여자와 손을 잡는 것을 지하철 선반 너머로 목격했다. 죽지는 않았지만, 왼쪽 가슴은 반토막이 났다.
2. 혜진의 6개월
혜진은 31세 마케터. 클라이밍을 취미로 시작한 동호회에서 만난 지훈이란 남자와 금세 친해졌다. 둘은 주말마다 암벽장을 찾았고, 품에 안고 추락을 막아 주는 순간들이 많았다.
지훈은 “너랑 있으면 편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혜진도 “그러게, 나도 편해”라고 답했다. 어느 금요일 저녁, 지훈은 연장 근무라며 10시 넘게 혜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혜진은 한 시간 만에 장소를 달려갔다. 회사 앞 편의점에서 만난 지훈은 피곤한 얼굴로 혜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그날 밤, 지훈은 혜진에게 “오늘 말고도 같이 있고 싶다”고 말했다. 혜진은 “친구끼리 자주 만나면 좋지”라고 받았다. 하지만 지훈의 눈빛은 친구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 눈빛은 혜진의 배꼽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혜진은 그 눈길을 마주치지 못하고, 편의점 매대 위를 손으로 쓸었다. 그때부터 혜진은 지훈과의 밤마다 머리맡에 두고 있던 친구라는 단어를 찢어버릴까 봐 불안해했다. 결국 지훈은 동호회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시작했고, 혜진은 발가락까지 얼어 죽은 채 클라이밍을 그만뒀다.
금기는 왜 달콤한가
금기는 실은 최고의 양념이다. 맛없는 관계도 짜릿하게 만들어 준다.
인간은 끊임없이 금기를 향해 기어간다. 왜냐하면 금기는 감정의 폭발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삼킨 욕망은 점점 독성을 띤다. 그 독은 어느새 온몸을 타고 흐르며, 사소한 터치에도 신경을 과민하게 만든다.
심리학자 브루너는 ‘잠재적 관계’라는 말로 이 현상을 설명한다. 우리는 불확실성에 중독된다. “혹시 나도?”라는 가정은 도박판의 홀짝보다 강렬하다. 승리하면 최고의 보상, 패배하면 최악의 참사. 그만큼 핏줄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유나도 혜진도 포기하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상대의 손끝이 자신의 손등을 스칠 때, 그 0.1초가 최고의 쾌감이었다. 그 쾌감은 마치 군침 돋는 간장게장처럼, 짜릿하게 혀를 자극했다. 그리곤 그들은 다시 친구라는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아갔다.
문 앞에서의 마지막 30초
너는 지금 그를 생각하고 있지. 아마 그와 오늘도 밤을 함께 보냈을 거야. 3시 20분, 그가 너의 집 문 앞까지 데려다줬을 때, 너는 머뭇거렸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들어가자”라고 말하지 않는 이상, 넌 아무 말도 못 한다. 왜냐고? 친구니까.
그래서 나는 묻는다. 너는 정말 친구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그 이름 아래에 도사린 욕망이 끝내 네 몸을 갉아먹길 바라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