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불안정한 그를 고른 순간, 나는 사랑 대신 굶주림을 선택했다

불안정한 연인에게 홀려드는 여자들. 그들은 사랑이 아닌 ‘부족함’이라는 이름의 자기 자신을 채우려 한다. 실화 같은 두 개의 사례와 함께, 굶주림이 정체성이 되어버린 우리의 민낯을 파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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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떠날 수 없어. 다른 누구도 널 이렇게 못 채워줘.”

그가 술 취해 내 귀에 속삭일 때 나는 왜 그토록 황홀했을까. 그날 밤, 그의 휴대폰에 찍혀 있던 여자들 사진을 목 끝까지 삼켜버렸다. 눈물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한낱 ‘나만 없는 곳’에 있는 그의 불안정함이 나를 덮쳤다. 그는 언제나 조금씩 비틀거렸고, 그 틈새에 내가 꼭 들어갈 수 있었다. 안정은 따분했다. 불안은 배를 채웠다.


나는 단물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짜내고 싶었다.

불안정한 그를 고른 건 단순한 안목의 실패가 아니었다. 내 안에선 언제부터인가 ‘부족함’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가 늘 말했지.

“네가 더 잘하길 바랐어. 그러면 사랑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말은 나중에 연인으로 변했다. ‘네가 더 잘 참아주면, 더 가슴 아파해주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그래서 나는 불안정한 그의 열화와 같은 사랑을, 마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려는 피묻은 레몬처럼 탐했다. 그가 다른 여자와 뒹굴때마다, 나는 복수라도 하듯 더 깊이 그를 끌어안았다.

‘이게 끝이면, 다음엔 정말 나만 바라볼 거야.’

매번 다짐했다가, 또 다시 허기가 찾아왔다.


유리아, 그는 늘 거기 있었다

유리아는 스물두 번째 생일날 은재를 처음 봤다. 대학원 강의실 뒷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온 남자—시험 범위를 그때야 바꿔버렸다는 이유로. 유리아는 덜컥,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떨어뜨렸다. 은재가 그것을 줍는 순간, 유리아는 속으로 살폈다.

저 난폭함, 나한테만 쏠릴 수 있게 만들어볼까.

그날 이후 은재는 유리아에게 ‘피난처’였다. 술 먹고 여자 선배 집에 가버릴 때도, 시험지를 찢어버릴 때도, 유리아는 두 손 바쳤다.

“괜찮아. 너무 힘들지? 그래도 내가 있잖아.”

그녀의 품에서 은재는 아기처럼 잠들었다. 그러나 아침이면 은재는 다시 사라졌다. 장소는 늘 그녀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유리아는 해맑게 말했다.

“사실은 그가 없을 때가 더 설레. 불안정한 사람은… 늘 내가 채워줘야 할 것 같아서.”

결국 은재는 해외로 떠났다. 연락두절. 유리아는 지금도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하루에도 열두 번씩 확인한다. 프로필 사진이 바뀔 때마다, ‘또 누구랑 있나’ 싶어 숨이 턱턱 막힌다. 그녀의 침대 곁 테이블 서랍에는 아직도 은재가 썼다던 낡은 니트가 있다. 냄새는 다 사라졌지만, 유리아는 가끔 그걸 꺼내 코에 묻혀본다. 비어 있는 냄새마저 사랑이다.


수진, 조각난 사랑을 다시 조립하는 법

수진은 결혼 3개월 만에 이혼장을 받았다가, 그날 밤 민서를 만났다. 갓난 길모퉁이 편의점 앞에서 민서는 초콜릿바 하나를 뜯다가 울었다. 발렌타인데이에 회사에서 초콜릿 하나 받지 못했다나. 수진은 손에 들고 있던 이혼장을 뒤주머니에 쑤셔 넣고, 민서에게 한 입을 권했다.

“민서는 나한테서만 위로를 받았어. 회사에서 발렌타인 초콜릿도 안 받았대.”

수진의 눈이 번쩍였다.

내가 있으니까 다시 버틸 수 있는 거지. 내가 없으면… 민서는 아무것도 아냐.

민서는 일주일에 두 번씩 수진에게 전화해 울었다.

“차라리 회사 다니지 말까. 당신이 나한테만 집중해줘.”

수진은 민서의 두려움에 홀린다. 민서가 회사에서 한숨 돌릴 때마다 수진은 무릎 꿇고 다시 안았다.

“괜찮아. 내가 다 있잖아.”

그러나 6개월이 지나자 민서는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퇴근길엔 수진 대신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어느 날 민서는 퇴근 후 연락이 끊겼다. 새벽 두 시, 민서의 집 앞에서 수진은 복도 불이 켜지기를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 민서는 동료 여자 직원의 팔짱을 끼고 웃으며 올라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수진은 민서의 카톡 대화를 들여다보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내가 채워주지 못한 게 뭐야?”

그 순간, 수진은 깨달았다. 민서가 ‘불안정’하지 않아진 그날, 민서는 수진에게서도 사랑이 사라졌다는 걸.


‘사랑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 우리는 오히려 부족함을 선택한다.’

부모의 사랑이 일정하지 않았던 아이들은, 불안정한 연인에게서야 비로소 ‘진짜 사랑’을 확인한다. ‘이번엔 다를 거야’ 라는 환상은 뇌가 만든 고통받는 본능이다. 불안정한 사람의 사랑은 굶주린 아이의 입에 쏟아지는 국물처럼, 그 순간만큼은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은 환희를 준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배를 채우지 못한다. 불안정한 연인은 마치 허기진 턱끝에 얹힌 마지막 한 조각 빵처럼, 먹고 나면 더 깊이 파인 공허만 남긴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시 또 그 빵을 움켜쥔다. 허기짐 자체가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날 밤, 나는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두고 서 있었다. 불빛 속에 드러낸 식재료는 모두 싱싱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의 불안정함이 사라진 지금, 나는 무엇으로 배를 채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냉장고 속 고기와 야채는 모두 ‘부족함’의 실체라도 되는 양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문득, 누군가의 불안정함에 젖어 사랑한다고 믿었던 순간들이 겹쳐졌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진짜 굶주린 것은 사랑이 아니라, ‘부족함’이라는 이름의 나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이젠 그 굶주림을 채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빈 냉장고 속에 서서, 나는 혼자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어둠 속에서, 오직 허기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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