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정리가 덜 됐어. 너무 미안해.”
그가 한 달 전 새벽 2시 17분에 보낸 메시지는, 지금도 휴대폰 맨 위에 떠 있다. 잠금 화면을 켤 때마다 내 눈은 자동으로 ‘미안’ 두 글자에 머문다. 미안한 건 그보다 나였다. 미안해서, 끝까지 남아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이토록 달콤한 잔혹
그는 차라리 욕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미워”라고 말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싫증 났다고, 질렸다고, 다른 사람 생겼다고 단호하게 밀어냈다면 나는 지금쯤 울며 끝을 인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우리’를 지웠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했다. 시간을 끌며, 연락은 줄이고, 만나자고 하면 희미한 미소로 나를 받아들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그의 신호를 감지하는 데 능숙해졌다. ‘오늘은 괜찮은 날’인지, ‘한숨 쉬는 날’인지.
끝나지 않는 끝은 나를 더럽게 만든다. 각도를 달리해 파고들면 그의 말과 행동 사이에 숨겨진 ‘나는 아직 너에게 책임이 있다’는 미묘한 자책이 느껴진다. 그 미안함이 나를 계속 살려 두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부족한’ 사람으로 남는다. 끝내지 못함의 원인이 내게 있기 때문이라고, 나 스스로에게 납치된다.
실제로 일어난 듯한 두 이야기
지은의 경우
지은(31)은 지난 2월 새벽, 남자친구 현수의 집 현관에서 40분을 보냈다. 현관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현수의 운동화는 아직 신발장 안에 있었다. 그러나 벨 소리 두 번, 세 번 울려도 현수는 나오지 않았다. 현관문 위에 붙은 스마트 도어락은 암호가 그대로였지만, 지은은 문을 열 수 없었다. 열면 끝장이라는 걸 알았다.
왜 나는 차마 들어가지 못했을까. 아니, 왜 그는 나를 밖에 두고 잘 수 있었을까.
그날 이후 현수는 두 달째 연락 없었다. 그러다 지난 주 갑자기 “우리 집 앞 카페에서 잠깐만 나와줘”라는 문자를 보냈다. 나가면 현수는 머리를 길게 기른 채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대화는 7분 만에 끝났다.
- 나: 밥은 먹었어?
- 현수: 어.
- 나: 그럼… 언제쯤 정리가 돼?
- 현수: …잘 모르겠어. 정말 미안해.
그리고 현수는 자리를 떴다. 커피잔 두 개만 링겁게 남았다. 지은은 그날 밤 집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하지만 울면서도 내가 더 잘했더라면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현수의 연락이 온다 해도, 지금 바로 받지 않을 거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라는 말은 매일 밤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을 쳐다보게 했다.
유진의 경우
유진(29)은 여자친구 혜원에게서 ‘일단 헤어지자’는 말을 1월 들어서 들었다. 유진은 그날 혜원에게서 6년 만에 처음으로 “너 지금 좀 짐짝 같아”라는 말을 들었다. 충격이었다. 하지만 혜원은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연락을 끊지 않았다. 오히려 “밥 먹자”는 메시지를 자정 넘겨 보냈다. 유진은 그 메시지에 가방을 챙겨 나갔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혜원은 “우리 일단 친구처럼 지내자”고 했다. 거기서 유진은 끊임없이 자신을 재검열했다. 술버릇, 웃을 때 소리, 재킷 고르는 취향, 말버릇까지. 어느 날 혜원이 “요즘 니가 좀 느끼해진 것 같아”라고 말했을 때, 유진은 아예 목소리 톤을 낮췄다. 그러나 혜원은 다음 날 “왜 자꾸 말투가 억지스러워?”라고 물었다.
유진은 결국 혼자 숙소를 잡고 살게 되었다. 혜원은 주말마다 들러 “책 좀 빌려달라”며 하루를 보냈다. 떠난 척, 머무는 척. 끝내지 않는 끝에 유진은 괴물처럼 자신을 찢었다. 어떤 밤, 유진은 혜원의 새 메시지를 받고 답장을 띄우다가 문득 손이 멈췄다.
내가 왜 이래. 나는 이미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 혜원은 이미 끝났다고 했는데.
끝나지 않음의 이중 포획
우리는 왜 이 늘어지는 끝맺음에 매달릴까. 간단하게 말하면, 거부당하지 않는 죄책감 때문이다. 상대는 끝냈다고 선언하지도, 다시 시작하자고 제안하지도 않는다. 그 빈틈에 우리는 ‘내가 부족해서’라는 합리화를 투영한다. ‘부족한 나’라는 내면의 편린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끊임없이 관계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다.
심리학자 머레이는 ‘가능한 거부’라는 개념을 언급했다. 상대가 확실히 밀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되돌릴 수 있는 실수’라는 착각을 키운다. 차단하지 않은 채팅방, 삭제하지 않은 사진, 이사 가지 않은 동네. 이 모든 게 거부의 가능성을 유지한다.
게다가 느린 이별은 자아의 해체를 연기해준다. 우리는 끝난 사랑 속에서도 ‘연인으로서의 나’를 연기할 수 있다. 그 연기가 끊기면, ‘이제 누구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그 두려움은 지독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족한 나라는 가면을 쓴 채 연기를 연장한다. 상대의 미안함이 아니라, 상대가 남긴 시간의 틈이 우리를 옭아맨다.
“그러면 너는 지금 끝났다고 확신하니?”
아니다. 나 또한 그렇다. 오늘도 나는 2시 17분의 ‘미안’ 메시지를 꾹 눌러 저장해둔다. 그래도 혹시나, 다시 시작할 자격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혹은 그가 다시 돌아올 때, 내가 이미 완벽해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끝나지 않는 끝은 결국 우리가 자신에게 내리는 가장 길고 잔인한 선고다. 그 선고는 말한다.
너는 아직도 이 관계를 끝낼 가치가 없는 인간이야. 그러니까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끝내지 못하는 척해라.
이제 묻는다.
너는 정말 부족한 걸까, 아니면 차라리 부족하길 바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