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부터 발목까지, 꽉 묶여 있던 거야”
한밤중 소파에 앉아 술을 홀짝이던 준수가 툭 던졌다. 주변에서 ‘착하고 평범한’ 부부로 손꼽히던 그가 떠올린 건 지난해 여름밤이었다. 아내 지아가 깊은 잠에 빠진 새벽 3시, 그녀의 얇은 잠옷이 살짝 걷혀 있었다.
그러다 준수는 발견했다. 손목 안쪽까지 번진 붉은 실 자국, 옆구리를 타고 내려가는 희미한 멍자국. 마치 그녀의 몸이 누군가에게 끈으로 묶였다 풀어진 듯한.
순간 준수는 숨이 멎을 뻔했다.
이건… 내가 남긴 흔적도 아닌데.
욕망의 해부
그날 이후 준수는 혼란에 빠졌다. 왜 하필 지아의 흔적이 자신을 숨죽이게 했을까? 평범한 선량한 남편이라 믿던 자신의 머릿속에선 ‘아내가 다른 이와 격렬한 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한낮의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불길은 곧 뜨거운 환영으로 변했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묶이고, 몸부림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내가 몰래 지켜봤다면.’
준수는 자신이 ‘경쟁자’를 상상할수록, 아내의 떨리는 표정을 떠올릴수록 불쾌감 대신 낯설고 차가운 떨림이 솟구쳤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감정. 하지만 이기심과 소유욕이 만나 태어난 변종 욕망은 이미 어둡고 푸른 꽃처럼 피어 있었다.
그녀는 왜 고통을 몸에 새길까
준수는 몇 주 뒤, 우연히 지아의 서랍 맨 밑에서 수첩 하나를 발견했다. 첫 페이지에 적힌 날짜는 결혼 3주년이 지난 시점. 거기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오늘도 나는 상처를 품었다. 그래야 준수가 안심하니까.’
준수는 멍했다. 뒷장을 넘기자 지아의 손글씨가 점점 흐려졌다.
‘그가 나를 꼭 붙잡고 싶어하는 건 상처 때문이라면, 난 상처를 더 많이 만들어야겠지.’ ‘다른 사람에게 받은 멍과 흉터를 숨기며, 그가 내 몸을 더 깊이 파고들게 만든다.’ ‘내 고통이 우리 사랑의 온도계라면, 나는 차가워지거나 뜨거워져서는 안 돼.’
준수는 문득 지난겨울 기억이 떠올랐다. 지아가 얼굴에 멍을 들고 집에 들어왔을 때, 그는 미친 듯이 그녀를 껴안으며 사무쳤다. 그때 지아는 눈을 감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를 지켜줘.”
그 순간 준수는 자신이 처음으로 지아에게 완전히 소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지아는 그 멍을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얻어왔던 건가.
모든 부부 침실엔 은밀한 형광펜이 있다
청담동에서 심리 상담소를 운영하는 강유진 박사는 말했다.
“결혼은 어떤 계약이자 죄책감의 동거예요. 한쪽이 상처를 드러내면, 다른 쪽이 그것을 어루만지는 행위. 하지만 그 어루만짐이 곧 상처를 더 깊게 파고들 수도 있죠.”
실제로 그녀가 만난 부부 중엔 ‘상처를 자아내는’ 패턴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은 아내의 외도 흔적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흔적이 없으면 자신도 아내에게 끌리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의 고통에 반응하는 순간을 기억하고, 고통이 아니면 사랑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이 고통이라면, 우리는 서로를 계속 아프게 하는 수밖에.’
그대는 어디까지 상처를 바라볼 수 있는가
준수는 지아의 수첩을 다시 원래 자리에 넣었다. 그리고 잠든 아내의 옆에 누워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그만해.”
하지만 그 다음날, 준수는 지아의 새로운 흔적을 발견했다. 어깨에 선명한 멍. 그는 손가락으로 살짝 그 멍을 쓸었다. 그리고 이내 느꼈다. 차가운 피가 사지로 퍼지는 걸. 자신의 배신과 도덕과는 전혀 무관한, 오롯이 ‘그녀의 고통’이 불러일으키는 치열한 떨림.
나는 아내의 상처를 지우고 싶은가, 아니면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 사랑도 함께 사라질까 두려운가.
준수는 침대 끝에 야위어 앉아, 그 질문에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매일밤 두려움과 욕망 사이에서 잠을 청한다. 숨겨진 매듭을 풀고 싶다면, 먼저 그 매듭이 당신의 것이었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