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혹시 수면제 먹었어?" 그 질문의 순간
나는 유리병 뚜껑을 조심스레 돌리다가 그의 물음에 손가락을 놓쳤다. 작은 하얀 알약이 이불 위로 굴러떨어졌다. 갑자기 방 안이 너무 조용해졌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 어느새 내 귀엔 차가운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괜찮아, 이건 그냥 잠 잘 못 자서... 라고 말하려던 찰나, 나는 스스로에게도 설득력 없는 변명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든 사이에 벌어진 방의 변화
처음엔 단순했다. 새로 시작한 회사 적응에 잠을 못 이루던 나는 그의 전화를 끊고 매일 밤 똑같은 시간대에 약 한 알을 삼켰다. 11시 11분. 약 먹는 것도 이제 습관이 되었다. 딸랑—유리병 소리. 쓰윽—물 한 모금. 그러면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그가 나른하게 "아침이야, 일어났어?" 하고 보낸 메시지가 왜인지 달갑지 않았다. 손끝엔 여전히 약의 쓴맛이 남아 있고, 머릿속은 아직 잠긴 문처럼 무거웠다.
그래, 오늘은 연락 좀 늦게 할까.
알약이 준 선물, 혹은 저주
박서연이었던가. 28세, 광고대행사 AE. 나는 그녀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수백 번 들락거렸지만 최근 2주 동안은 그 조차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약을 먹고 나면 마치 뇌가 살얼음판에 올라간 듯 아무런 욕망도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오늘 저녁..."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죄송해, 오늘은 약 좀 먹어서..." 나는 그 말을 꺼내면서도 내가 왜 미안하지? 하는 인상 섞인 생각이 스쳤다.
그날 저녁, 서연이는 혼자 술집에 갔다. 남자친구였던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녀의 문자는 밤 11시 38분에 왔다.
[사진] 같이 마시던 와인 한 병. 그리고 그녀의 새로운 남자 동료의 손가락이 유리잔에 걸쳐 있었다.
안녕, 나의 욕망
약이 내게 준 건 단순한 수면이 아니었다. 사랑하고 싶은 마음, 연락하고 싶은 충동,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갈증까지 모조리 덮어버렸다. 마치 뇌의 한 구석에 차가운 철문을 내린 것처럼.
그런데 이상했다. 이전까진 그의 부재가 목끝까지 아팠는데, 약을 먹고 나면 그 아픔도 흐릿해졌다. 그게 나쁜 일인가?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랑이 온몸을 태우는 불이었다면, 약은 그 불 위에 뿌려진 물이었다.
그녀의 방, 그리고 사라진 온도
"왜 그래? 요즘 좀 이상해." 김현수는 우리 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그의 품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답답함만 느꼈다. 따뜻한 체온이 온몸에 닿는데도, 몸은 차가워지기만 했다.
나는 정말 그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사랑해야 할 것처럼 행동하는 걸까?
현수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냈다. 유리병이 손에 닿는 순간 그는 멈췄다. 하얀 알약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을.
"이게... 계속 먹는 거야?"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 순간, 현수의 눈빛이 식었다. 마치 실수로 불을 끈 전구처럼.
욕망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
우리는 그날 밤 잠도 안 자고 말다툼을 했다. 그는 내가 변했다고 했고, 나는 그저 피곤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두 말 모두 맞았다. 나는 변했고, 또 피곤했다. 사랑을 유지하는 일이 너무나 피곤했다.
현수가 떠난 뒤 나는 홀로 침대에 누웠다. 유리병을 바라보며 한 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는 단순히 잠을 못 자서가 아니라, 사랑을 못 해서 이 약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 그의 냄새, 그의 손길. 모든 게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멀어진 것이다.
남겨진 질문
약 한 알이 사랑을 망친 걸까? 아니면 사랑이 이미 망가져서 약을 찾은 걸까? 우리는 종종 잘못된 해답을 잘못된 질문으로 덮어 버린다. 하지만 침대 머리맡에 놓인 유리병은 침묵으로 대답한다.
나는 여전히 매일 밤 똑같은 시간에 약 한 알을 먹는다. 다만 이젠 누군가의 목소리 대신, 한때 닿고 싶었던 그 욕망의 잔해를 삼키고 있다.
혹시 당신도 사랑을 멀어지게 만든 작은 습관이 있진 않은가. 잠든 사이에 문을 닫아버린 당신의 유리병은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