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잠깐만.”
그가 재킷 지퍼를 내리려던 손을 멈췄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미 냄새를 맡은 뒤였으니까. 달달한 머스크와 약간의 땀, 그리고 흔들릴 듯 말 듯한 두려움.
"혹시… 최근 검사 결과 같은 거 있을까?"
침대 발치에서 불이 꺼진 조명이 떨렸다. 조용했던 방 안에 어색한 메아리가 흔들렸다. 너무 늦은 걸까, 아니면 차라리 더 이른 걸까.
살얼음 위에서 피어난 입맞춤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다. 안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민감한 코드인지. 하지만 동시에, 안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모든 것이 냉정한 거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도.
내가 원하는 건 단순히 성병 검사 결과가 아니야. 그가 나를 얼마나 ‘간과’ 없이 원하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지.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그녀는 아무도 몰래 병원을 다녔다
민준이의 손가락이 내 다리를 어루만질 때, 서연이는 지하철 2호선 끝자락에 있는 작은 산부인과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네 번째로 보는 곳이다. 이름도, 간판 색깔도 모두 달랐다.
"지난주에 검사받은 분 계세요?"
간호사가 부르자 서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에 꾹꾹 접은 종이를 꺼냈다. 아직 뜯지 않은 봉투.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가능성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렸다.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 지금 이 밤 민준이와의 모든 장면이 허공으로 날아갈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녀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불과 열흘 전만 해도 민준이와의 첫 눈 맞춤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떠올렸다. 지하 주차장에서 숨죽이던 키스. 손등이 닿았다가 허리로 스며드는 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서연 씨, 들어가세요."
의사는 말없이 종이를 건넸다. 음성. 아주 간단한 두 글자였지만, 그녀의 가슴속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민준이에게 보여줄까, 말까. 아니, 이미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치명적인 걸까.
그날 밤 그녀는 민준이의 카톡을 무시했다. 잠시 후, 민준이는 서연이가 피한 이유를 냉정함이라고 단정했다. 실제로는 그녀가 두려워서—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그리고 그것까지도 사랑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아무도 몰래 결심했다
재훈은 동네 피부과를 나서면서 숨을 죽였다. 피검사, 소변검사, 그리고 2주 뒤 문자. 세상에 둘도 없이 익숙한 절차인데도, 이번엔 왠지 모르게 뒷목이 차가워졌다.
그는 수진이의 집 현관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한 달 전, 술에 취해 같이 올라온 밤. 수진은 문 앞에서 그를 막았다. "오늘은 그냥… 미안." 그때 재훈은 수진이 말없이 건넨 키패드를 꾹 눌렀다. 0923. 그녀의 생일.
내가 검사를 받는 건, 사실 수진이를 위한 게 아니야. 나 자신을 위한 거지. 내가 얼마나 건강하고, 얼마나 정상인지를 증명하고 싶어서.
살아온 날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릴 것만 같은 2주가 흘렀다. 재훈은 받은 결과를 캡처해 수진에게 보냈다. 세 점. 단순한 점 세 개가 이어진 말줄임표처럼 보였다.
"나 약속 지켰어."
수진이 답장이 없었다. 30분, 1시간. 그러다 문득, 화면 위에 떠오른 작은 말풍선. "몇 시에 올까?"
뒤틀린 욕망의 정원
우리는 검사라는 단어를 꺼낼 때마다, 사실은 서로의 결함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숨긴다. 모두 음성이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상대가 내게 음성일 만큼 건강해지길 원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거래의 변주처럼 들린다.
심리학자들은 이걸 ‘위험 이동화’라고 부른다고 한다. 죄책감을 옮겨 붙이는 행위. 내가 불안하니까 너도 검사받아라. 내가 두려우니까 너도 결과를 보여줘.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종이 한 장으로, 감정의 백만 페이지를 대신하려 든다.
조용한 방, 마지막 질문
이불 위에 누워 눈을 맞추는 순간, 당신은 혹시 이런 상상을 해본 적 있는가?
내가 음성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순간, 상대는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건강함을 보여주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에선 내 결함마저도 받아줄 사람을 찾는다. 그래서 봉투를 열어보기 전에, 혹은 침대로 들어가기 전에 단 한 번.
당신은 누군가에게 당신의 숫자와 글자를 보여주는 순간, 정작 숨기고 싶었던 무엇을 드러내고 있었는지 알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