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건물 벽에 드리운 너의 그림자가 너무 길었다. 우리는 이태원 골목 초밥집에서 한 시간째 실룩거리며 손톱으로 우동 국물을 그렸다. 너는 은근슬쩍 내 손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손가락이랑 손가락이랑, 왜 이렇게 딱 맞냐.
그날의 일곱 시간은 눈 깜짝할 새였다. 전시장 미닫이문을 밀어젖히고 나올 때는 벌써 노을이었다. 술집 테라스에서 발가락으로 너의 발등을 톡톡 쳤고, 너는 한숨을 쉬며 입을 맞췄다. 스킨십의 밀도가 두꺼워질수록 나는 오늘 밤엔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혔다.
집 앞 골목, 한강 냄새가 스멀스멀 밀려왔다. 너는 내 손에 쥐어준 니트 조끼를 다시 걸치며 말했다.
내일 봐.
그게 마지막 문자였다.
조끼 안주머니에 남은 너의 속눈썹 한 올
월요일 새벽 3시 26분, 나는 아직도 니트의 주머니를 뒤졌다. 딱 한 올, 갈색 속눈썹이 손끝에 달라붙었다. 너는 어느 순간 눈을 비비다 떨어뜨렸을 테고, 나는 그걸 아직도 간직한다. 이건 기념품이 아니라 증거다.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고 착각했던 증거.
일곱 시간 동안 우리는 연인인 척했다. 너는 내 핸드폰 비밀번호를 물어보지도 않았고 나도 네가 시험 끝났다고 뻥친 걸 들추지 않았다. 그냥 사실은 아니라도, 그날만큼은 진짜처럼 보여야 했다. 사귀는 사이 아닌데, 손을 잡고 있어야 했다. 입술이 닿았고 가슴이 닿았지만 서로의 이름 석 자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흥분을 더했다.
실제 같은 이야기 1: 준영과 지은, 한남동에서
준영은 지은의 검지 손톱에 묻은 잉크 자국을 발견했다. 공책을 가득 메운 그녀의 필기가 떠올랐고, 준영은 문득 그녀가 문학상을 준비한다는 말이 진짜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은은 준영의 눈밑 지방이 두툼해 늙어 보인다며 꾹 눌렀다.
너는 왜 매일 피곤해?
음… 잠을 안 자서?
두 사람은 홍대 술집 뒷문을 통해 나와 택시를 잡았다. 지은이 내린 장소는 준영이 하루 전에 구해 놓은 원룸이 아니었다. 지하철역 이름도 달랐다.
택시 문 닫히는 순간, 준영은 지은의 머릿결이 손에 남았다. 그건 냄새였고 촉각이었고, 지은이 아닌 지은과 함께했던 시간이었다. 다음날 지은에게 온 문자는 없었다. 대신 준영은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3일 만에 바뀐 걸 확인했다. 지은은 웃고 있었고, 그 사진 한 컷에 준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실제 같은 이야기 2: 서연이의 일요일 흔적 지우기
서연이는 손톱 깎이를 4번 돌렸다. 톱밥처럼 떨어진 손톱 파편이 변기 물 위에 떠다녔다. 어젯밤 민재가 서연이의 손가락을 한 입에 넣었던 기억이 찌릿했다.
민재는 서연이가 “다음엔 어디로 가야 하죠?”라고 묻자 대답 대신 목뒤에 입을 물렸다. 그건 약속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기만하는 제스처였다. 민재는 새벽 1시 18분, 서연이 잠든 틈을 타 나갔다.
화장실 거울에 붙은 포스트잇 한 장. 너무 좋았어. 미안. 볼펜 잉크가 번져 있었다. 서연이는 그걸 어떻게든 지우려 30분간 스크럽했다. 하지만 미안이라는 단어는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거울이 깨끗해질수록 서연이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왜 우리는 사라지는 방식에 끌릴까
연락이 끊긴다는 건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다. 일곱 시간의 친밀함은 너무 짧아서 완벽하게 썩지도 않은 음식처럼 남는다. 입에선 거짓말이 나오지만 속삭임은 진짜였다는 착각.
사람들은 연락 두절을 가볍게 욕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실종의 감정이 어떤 상처보다 깊게 각인된다는 걸 안다. 그 남자는 도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물음은 사실 나는 왜 그만큼 원했을까라는 자문의 변주다.
흥미로운 건, 우리가 사라진 이의 흔적을 끊임없이 수집한다는 점이다. 속눈썹 한 올, 잉크 자국, 포스트잇 하나. 이건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 나를 떠난 욕망의 유골이다.
그림자가 사라진 뒤의 질문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일요일 저녁, 아직도 뜨거운 손끝을 노트북 키보드에 비벼 대며 그리워한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네가 사라진 건 아니고, 네가 원했던 나라는 가능성이 사라진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