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품겠다”는 그 한 마디에
"씨앗을 품겠다."
그녀가 침대 옆 스탠드만 꺼뜨려놓고, 말했다. 냄새 섞인 옷장 한쪽에 걸린 니트가 흔들렸다. 창밖으로 아침 7시 반, 아직 켜지지 않은 고깃집 간판 불빛이 시뻘건 눈빛처럼 반짝였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또르륵 맥주잔이 흔들렸지만, 그건 알코올 때문이 아니었다. 네 번째 잠자리였고, 우리는 서로의 풀네임도 외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씨앗이라는 단어를 입에 넣었다. 눈을 반짝이며, 마치 선물의 리본을 미리 뜯어본 아이처럼.
나는 다음 날 링 미용실에 갔다. 실버 쿠플링에 Daddy와 Mommy를 새겨 넣는 어이없는 일을.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낼 때 손이 떨렸다. 그건 이미 복선된 미래를 사는 일이었다.
그녀는 무엇을 원했을까, 나는 무엇을 두려워했을까
그녀가 원한 건 진짜 태였을까? 아니면 나를 가두는 울타리였을까?
태는 관계의 최후의 검이자 최초의 올가미다. 한 번 그것이 확인되면 남자는 ‘도망’이라는 옵션을 잃는다. 그 사실을 그녀도 알았고, 나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두려웠고, 그녀는 욕망했다. 그녀가 원한 건 아기가 아니었다. 내가 무조건 남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아기는 그 확신의 유령 같은 담보였을 뿐.
나는 그 두려움마저도 환각처럼 즐겼다. 자발적으로 수갑을 채워달라는 감각. 결국 나도 나를 옭아매는 스릴을 원했던 걸까. 그녀의 손에 내 목을 맡기며, 난 복수를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의 실수**라는 이름표를 단 쾌감.
은밀한 일기—빨간 펜으로 써 내려간 6개월
2023년 6월 3일
오늘 재훈이랑 처음 잤다. 피임 안 했어. 약 먹는 게 까먹었다고 우겼지. 실은 일부러.
6월 25일
약국에서 테스트기 7개 샀다. 모두 음성. 슬퍼서 울었다. 재훈이는 “또 아니야?” 하며 안심한 표정. 나는 그 표정을 떠올리며 손에 든 펜을 꽉 쥐었다.
7월 10일
집 앞에 임신 예비 학원이라는 가짜 카페를 차렸다. 블로그 아이디 ‘베리맘맘’으로 가입, 가짜 육아 일기 연재. 댓글 200개 넘음. 거짓 데이터가 거짓 권력을 낳는 순간이다.
8월 1일
재훈이에게 씨앗을 품겠다고 하니 표정이 귀여웠다. 반지를 사겠다고 하더라. 난 두 번째 줄에 이미 아이 이름 지어놨다. ‘하준’. 심지어 태명도.
8월 15일
재훈이 부모님 모임에 데려갔다. 아직 임신 안 했다고 했더니 어머니 표정이 금방 식었다. 예전엔 “우리 며느리”라고 했는데. 결국엔 태가 열쇠였던 거야.
승민의 녹취록—그녀가 사라진 날
"그래, 아무것도 없어. 네가 바라던 대로."
녹음기 속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다. 아무것도 없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밤의 실수는 결국 실수가 아니었고, 복수는 시작도 끝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씨앗이라는 이름표를 단 권력을 내게 넘겨줬을 뿐, 진짜 씨앗은 뿌리지 않았다.
나는 녹음기를 끄고, 창밖으로 아침 7시 반 고깃집 간판 불빛이 꺼지는 걸 봤다. 그녀의 원룸 옷장 냄새는 아직도 코끝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없는 방, 그리고 나 혼자 남아 있는 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