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12분. 민주는 침실 문을 살짝 열었다. 성준은 곤히 잠겨 있었다. 그의 손이 미끄러져 나간 자리, 시트 위에 새겨진 흔적 하나. 달콤하면서도 낯선 향수 냄새. 그 냄새를 마지막으로 들이마신 순간, 그녀는 이미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그 향기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떠나기 위한 신호였다.
모텔 301호, 미닫이문 반쯤 열린 욕실
해변 모텔에 도착한 건 오후 2시. 민주는 키를 받아 들고 아이들 손을 잡았다. 유진이와 유나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민주는 문을 닫고 노브를 돌렸다. 철컥.
방은 희미한 형광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 커튼은 반쯤 내려져 있고, 욕실 문은 흔들리며 열리고 닫히고를 반복했다. 샤워기에서 아직 맺혀 있던 물방용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선명했다.
"엄마, 여기서 우따 자는 거야?"
> "응. 오늘만. 아빠 없이."
> "아빠는?"
> "우리만의 비밀이야."
민주는 유진이를 침대 끝에 앉혔다. 유나는 TV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돌렸다. 뚜뚜둑. 어린이 예능이 나왔다가 뉴스가 나왔다가 곧 드라마가 나왔다. 주인공 여자의 눈물이 화면 가득 차자, 민주는 리모컨을 빼앗아 버튼을 껐다. 검은 화면이 되자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더 이상 엄마만의 얼굴은 아니었다.
남겨진 남자의 하루
서울 반포 자택. 성준은 눈을 떴다. 침대 한쪽이 푹 꺼져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사라진 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냉장고 위 쪽지. ‘나와 아이들은 3박 4일 여행 간다. 연락하지 말아줘.’ 문장 끝에 마침표 대신 짧은 선 하나, 마치 누군가 말을 끊은 듯한 여운.
성준은 거실로 나갔다. 아이들 신발 정리대엔 유진이 운동화 한 짝이 빠져 있었다. 운동화 안쪽엔 모래가 아직 묻어 있었다. 그는 운동화를 들어 바닥을 털었다. 모래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민주가 아이들 데리고 떠난 바로 그날 아침, 동네 놀이터에서 밟았던 모래였다.
성준은 화장대 서랍을 열었다. 립스틱 하나, 향수 하나. 향수 뚜껑은 열려 있었다. 그 향기는 아침에 민주가 뿌린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향기는 성준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망의 향기였다.
은실의 5일, 아이들과 단둘이
강릉 펜션. 은실은 세 아이를 데리고 5박 6일 일정으로 왔다. 월요일 아침.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아이들을 깨웠다.
"오늘 학교 안 갈래? 엄마랑 바다 보러 갈까?"
> "진짜? 아빠는요?"
> "아빠는 모르는 거야. 우리만의 비밀."
그녀는 체크인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아이들과 TV를 봤다. 점심엔 편의점 도시락. 오후엔 수영장. 저녁엔 라면. 아이들은 처음엔 신이 났지만, 사흘째 되던 날 밤, 막내가 물었다.
"엄마, 우리 집에 언제 가요?"
은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히 도망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증명하려 했다. ‘나는 엄마일 때도 이렇게 자유롭다’는 것. 하지만 그 자유가 아이들에게도 감옥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녀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들이 느낀 욕망, 그리고 두려움
민주는 세 번째 밤, 아이들이 잠든 후 발코니에 나섰다. 바다 소리가 들렸다. 파도가 모래 위로 밀려왔다가, 다시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는 문득 성준이 생각났다. 그가 지금 쯤 뭐하고 있을까. 아마도 맥주 한 캔 들고, 빈 거실에서 하루 종일 TV를 보고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아이들만 데리고 떠났을까.’
> ‘그건 단순히 남편을 피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진짜 자유롭게 느껴지는 순간은,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준 앞에서 할 수 없는 것들. 아이들 앞에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들. 그 경계를 뛰어넘는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돌아오는 길, 그리고 남겨진 질문
민주는 네 번째 날 아침,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 집에 가자. 아빠가 기다릴 거야."
아이들은 반색했다. 유진이는 침대 밑에 숨겨 뒀던 장난감을 꺼냈다. 유나는 미니 가방에 쑤셔 넣은 펜션 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들은 돌아가고 싶었다.
집 현관문 앞. 성준은 서 있었다. 아이들이 달려가 안겼다. 민주는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눈으로 말했다.
‘나는 돌아왔지만, 예전의 나는 아니에요.’
성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아내가 언제든지 다시 사라질 수 있는 존재임을. 그녀는 이미 그 가능성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도망은, 더 이상 그를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당신은 지금, 누구의 손을 잡고 어디로 떠나고 싶은가. 그리고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무엇을 남겨둘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