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이 3cm 떨어진 순간"
지하철 2호선, 종로3가역. 밤 11시 47분.
나연은 손에 쥔 편의점袋子를 꼭 쥐었다. 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그의 어깨가 살짝 부딪힌다. 숨결이 닿는다. 코끝이 스친다. 그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집 앞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둘을 한 줄기로 묶는다.
아직도 키스를 안 했어? 그 물음이 나연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87일째 만남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떨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더 떨려. 키스하면 끝날까 봐.
입술보다 깊은 구멍
우리는 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사귀고 있다고 말할까?
안 해도 돼, 아직. 그 말은 동시에 언젠가는 하겠지라는 다짐이다. 미뤄진 쾌감은 독처럼 익는다. 혀끝이 아닌 뇌 안쪽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날들이 쌓이면서, 그 빈 공간은 점점 거대한 허공이 된다. 그 허공 안에서 우리는 상대를 상상한다. 더 뜨겁게.
'만약 지금 키스했다면 어땠을까.' 그 질문이 우리를 더 참을 수 없게 만든다.
그녀는 8월 9일에 사라졌다
채원은 매일 오후 5시 30분, 동네 서점 ‘문학살롱’에 들렀다. 시집 한 권 들고 2층 카페로 올라가면, 그가 항상 있었다.
오늘은 누구 책이에요?
김소월.
시려.
그래서 좋아.
그들은 122일간 책 한 권만큼의 거리를 유지했다. 손가락이 시집 위에서 살짝 닿을 수 있는 거리.
8월 9일, 장마가 끝나자마자 서점 2층 창문이 열렸다. 바람이 들어와 페이지를 넘겼다.
채원이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처음으로 말했다.
오늘은... 괜찮을까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문장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제는 끝내야 할까. 그 생각이 먼저 왔다.
민재는 매일 코끝이 맞닿을 때까지 다가갔다
회사 동기 민재와 소희는 6개월째 점심을 같이 먹었다. 민재는 매일 소희의 도시락 반찬을 하나씩 훔쳐 먹었다.
요거 먹어도 돼?
먹어도 돼, 그럼 내일은 네가 콜라 사.
그날도 소희는 김치를 젓가락으로 쥐어 주었다. 민재는 그것을 먹고, 그녀의 젓가락 끝을 한 번 씹었다.
나랑 사귈래?
벌써?
6개월이야.
키스는?
나중에.
언제?
**평생 기다릴 수도 있어.**
소희는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사귀는 거야. 아직 키스는 안 해.
우리가 지키는 잔인한 틈
키스를 미루는 건 단순한 수줍음이 아니다. 그건 더 원시적인 공포다.
입술이 닿으면 끝날까 봐.
그 끝에는 두 가지 종말이 있다.
- 사랑이 실체로 굳어져 버릴 때
- 사랑이 아니었음이 드러날 때
우리는 두 종말 모두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사랑을 죽음보다 영원하게 보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떨림의 미학
성적 긴장은 결국 죽음의 반대편이다.
키스를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관계를 완성하지 않는다. 완성되지 않은 것은 부패하지 않는다. 그 잔인한 논리가 우리를 3cm 앞에 세워둔다.
그 3cm는 키스보다 더 치명적인 흔적을 남긴다.
손등의 털끝이 스칠 때마다, 숨결이 닿을 때마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몸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입맞추지 않은 채
나연은 오늘도 종로3가역 2번 출구에서 그를 기다린다. 127일째.
오늘은 어때?
...그래도 아직.
그들은 걸어간다. 손은 맞잡지 않지만, 손등이 스친다. 어깨가 부딪힌다. 그리고 골목길에 들어서면, 가로등 아래에서 둘은 3cm를 유지한 채 서로를 바라본다.
만약 지금 키스했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었을까?
그 질문이 아직도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