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너무 늦었어. 내일 일어나야 하니까."
지원은 목소리를 낮췄다. 승민이 문 앞에 서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 좀 들어 봐, 눈이라도 마주쳐 봐.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리는 남편의 뒷모습이 문 틈 사이로 사라졌다. 스프링이 살짝 삐걱이는 소리, 이불 차는 소리. 그러고는 침묵.
지원은 서랍 속 숨겨둔 손마사지 오일을 꺼냈다. 코코넛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유통기한이 넘은 오일을 손등에 살짝 묻혀 본다. 끈적한 감촉이 아직도 살아 있다. 이게 우리 마지막이었지. 세 달 전, 승민이 불쑥 "피곤하다"며 어깨를 돌린 날. 그때부터 글쎼,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몸은 숨도 안 쉬었다. 아니, 숨은 쉬었지만 서로의 숨결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느껴지는 허공
결혼 6년 차, 딸 하나. 부부의 침실은 언제부턴가 ‘각자의 방’이 되었다. 옷장 너머, 화장대 너머, 휴대폰 너머. 서로의 시선이 스치지 않는 거리.
‘우리가 왜 이렇게 됐을까?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지원은 어떤 날은 통증처럼 느꼈다. 손가락마디에 맴도는 상처처럼. 어느새 몸은 익숙해졌다. 누워 있으면 두 개의 체온이 하나의 온도로 스며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 뒤척이는 순간 손이 스친다. 그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혹시 틀어진 걸 알까 봐, 혹시 거절당할까 봐. 그 두려움이 먼저 움직인다. 이불 끝을 꼭 잡아당기고, 몸을 최대한 모서리로 밀어낸다.
너와 나 사이, 숨겨진 욕망의 층위
아는 여자들이 있다. 은밀히 속삭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야’라고.
"우리는 2년째예요." 지원의 옛 친구 혜진이 한숨을 삼켰다. "처음엔 아기 탓, 그다음엔 일 탓, 이젠 그냥 그런 거래요. 솔직히 말하면, 섹스보다 새벽 두 시까지 혼자 넷플릭스 보는 게 더 편해요."
섹스보다 혼자. 그 말이 가시처럼 박혔다. 지원은 떠올렸다. 승민과의 마지막 때, 그가 머리맡 스탠드 불빛을 끄던 순간. 어둠 속에서 느껴졌던 손길, 너무나 낯설어서 몸이 굳었던 순간. 그때도 지원은 생각했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 되면 어쩌지?’ 그리고는 바로 시선을 피했다. 그래, 차라리 싫증이 난 거라고, 아니면 나 자신이 변한 거라고.
혜진의 비밀, 혜진의 불안
혜진은 한 달 전부터 남편 없는 시간을 노렸다. 출근길 지하철 안, 회사 화장실 칸, 늦은 밤 거실 소파. 그녀는 몰래 성인용품을 꺼냈다가, 다시 고이 접었다. "눈치가 너무 보여요. 혹시 발견하면 끝이니까."
혜진의 남편은 ‘그런 것’엔 전혀 관심 없는 사람이었다. 혹여나 흔적이 남으면 끝장이라는 듯이, 침대 밑 깊숙이 두고 오래된 키트를 꺼내쓴다. 혜진은 침대 옆 선반에 작은 메모지를 붙였다. ‘오늘도 참았다.’ 매일 뜯어 쓰는 그 메모지가 점점 구겨진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사랑한다고 결혼했는데, 결국엔 서로의 손길이 두려워지는 거야.’
수진은 다르게, 더 깊이
수진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승진이라는 핑계로 남편과 ‘주말마다 자는’ 시스템을 한 달째 유지하고 있었다.
금요일 밤, 남편 도현이 찾아왔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마신 뒤, 수진의 팔을 잡았다. "이번 주말은 같이 자자." 수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 뒤로 번뜩였던 게 뭐였을까. 혹시 ‘싫증’이었을까. 아니면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수진은 화장실로 도망갔다. 거울을 마주 보는데, 목덜미에 작은 반점이 보였다. 이건 뭐지. 며칠 전, 회사 동료와의 손가락이 스친 자리. 0.5초, 아니 0.3초의 스킨십. 그때 피부에 번진 전율이 떠올랐다. 지원은 놀랐다. 나도 모르게. 그 반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밤마다 번져갔다.
왜 우리는 이 끌림에 굴복하길 원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간단했다. 금기. 사랑하는 사람과의 몸을 ‘금지’하는 순간, 그 ‘금지’는 반동이 된다. 마치 유년 시절 부모님이 못하게 했던 사탕이 더 달콤했던 것처럼.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장기간 무성애 부부’에게서 나타나는 환상은 종종 ‘타인의 손길’에 대한 착각이 아니라 ‘과거의 연인 혹은 처음의 우리’에 대한 향수라고. 즉, 지금 이 침대 위의 공백을 메우려는 건 남편의 몸이 아닌, ‘우리가 처음이었던’ 온도를 회복하려는 욕망이다.
지원은 문득 깨달았다. 승민이 잠든 방 문 앞에서 그녀가 손을 뻗었던 건,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서로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저 엄지손가락으로 문고리를 톡톡 칠 뿐.
‘혹시 문을 열어 주면, 다시 그때처럼 안아줄까?’
당신의 침대, 아직도 뜨겁길 바라
밤이 깊었다. 지원은 거실 불을 모두 끄고, 침대로 향했다. 승민은 코를 골고 있었다.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려다 말았다.
왜냐하면, 시작은 늘 내가 먼저였으니까.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게, 머릿속에 작은 시나리오를 그려 넣었다. 내일 아침, 커피 한 잔을 건네며 말할 것이다.
"나, 아직도 네가 그리워."
그리고 승민이 놀라 눈을 뜨면 어쩔까. 그때 지원은 미소 지으며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다시 처음처럼 서로의 온도를 알아보는 방법을 찾아보자."
아니면, 그대로일까.
문을 닫으며 그대로일까.
당신은 지금, 닫히지 않은 문 하나쯤 열어 두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