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아기를 가져야만 해”
“회사 앞 카페, 오후 4시 12분.” 지수는 아직 퇴근도 안 한 시간에 전화 한 통으로 불려났다. 남자는 자리에 앉자마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제목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냥 빈 종이 위에 프린트된 난소 나이와 자궁 건강 지표, 그 아래 작은 체크박스 네 개.
[ ] 한 달 내 임신 확인 [ ] 결혼식 6개월 이내 생략 가능 [ ] 육아는 부모님과 함께할 것 [ ] 이의 없음
그는 펜을 쥐어주며 속삭였다. “우리 엄마가 아기 사진 보고 싶다고 하셨어.”
욕망의 해부
그날 저녁 지수는 회사 화장실 변기 뚜껑을 붙잡고 울었다. 왜 지금 나야 하지? 그러나 손목에 남은 펜 자국은 이미 ‘동의’를 써버렸다. 프로포즈는 없었다. 다만 회사 점심시간에 남자와의 첫 키스가 떠올랐다. 그때는 아직 “결혼 따위는 재미로”라고 웃던 입술이었다.
이건 단순한 임신 강요가 아니다. 이는 ‘나를 선택하려면 너의 자궁부터 검수받아라’는 권력 선언이다. 사랑 앞에 내민 반지도, 무릎 꿇는 장면도 없다. 대신 난소 나이가 적힌 종이 한 장이 날아든다. 그리고 그 종이는 말한다. “네 몸이 우리 사랑의 담보다.”
“사랑한다면서 왜 피임해?”
민서는 29살, 대기업 마케팅 팀장. 연하의 예비 사위가 처음으로 장모님 댁에 발을 들인 날이었다. 식탁 위에는 더덕구이와 미역국, 그리고 아무도 시킨 적 없는 산모용 엽산 테이블 세팅이 놓여 있었다.
장모님은 말했다. “사랑이면 그냥 아기 주면 되지. 결혼식은 아기 돌잔치랑 같이 하면 되잖아.”
민서의 남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는 피임약 알약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민서 모르게 장모님이 가방에서 꺼낸 것이었다.
“우리 딸 건강하니까, 한 방에 다 끝내자. 요즘은 다 그렇대.”
내 몸이 그렇게 효율적인가. 민서는 속삭였다. 사랑과 출산, 결혼까지 한 번에 처리되는 가방 같은.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심리학자 슬라터는 말했다. “인간은 소유욕과 선공포가 뒤섞인 지점에서 가장 강렬한 집착을 느낀다.” 프로포즈 조건이 ‘아기’로 단순화될수록, 우리는 그 음모의 단순함에 감염된다. 사랑이 복잡한 감정 계산을 요구하지 않고, 한 방에 ‘생명’으로 환산된다는 사실이 황홀하다.
아기가 생기면 끝까지 책임져야 해. 이 금기의 속삭임은 어쩌면 우리를 더 깊숙이 유혹한다. 사랑의 증거를 단 한 번의 임신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이 지닌 슬픈 확실성.
사내 동료 영희가 회식자리에서 속삭였다. “난 약혼 대신 피임약 통째로 남자한테 던져줬어. 이게 나의 프로포즈야.” 그녀는 그날 밤 남자와 떨어졌다. 그리고 몇 달 뒤, 임신 16주차 영상을 단체 카톡방에 올렸다. “결혼식은 아기 돌잔치 때 같이 했대.”
마지막 질문
당신은 지금, 누군가에게 아기를 요구받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아기를 제안하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가. 사랑의 증거를 자궁 안의 심장 소리로 바꾸는 순간, 과연 우리는 사랑을 더 크게 얻는 것인가, 아니면 더 큰 나의 일부를 빼앗기는 것인가.
그리고, 그 임신 테스트기에 뜨는 두 줄은 과연 사랑의 서약서인가, 아니면 네 몸을 담보로 한 계약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