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당신의 연인은 누가 먼저인지 말할 수 있나요?
앙상한 새벽 3시, 침대 옆 조명 하나만 켜둔 방. 민우가 내 손목을 놓고 말했다. 아니, 내뱉었다.
“유진이는 너보다 잠이 많아서…”
그 한마디에 머리끝이 쭈뼛 섰다. 유진이. ‘이’라는 반말 끝자락에, 나와는 격식을 지키던 호칭의 틈이 선명했다.
10년. 10년 동안 나는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믿어왔다. 스케줄 공유, 감정 체크인, 안전 섹스 보고서까지. 완벽한 협의의 나라였다. 그런데 그 순간, 서열이 언어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숨겨진 가슴의 계곡
‘폴리는 자유지, 경쟁이 아니야.’ 그건 내가 스스로에게 입힌 거짓말이었다.
폴리아모리는 올림픽이었다. 금메달은 ‘가장 덜 질투하는 연인’에서, 은메달은 ‘가장 유연한 스케줄러’에게로. 동메달은, 어쩌면, ‘가장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
나는 동메달이었다.
민우의 다른 연인, 유진, 수진, 도현—이름이 세 개일 때는 괜찮았다. 그러나 숫자는 언제나 늘어났다.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나는 조용히 점수표를 수정했다.
- 누가 더 많이 웃게 만들었나.
- 누가 더 긴 밤을 지새웠나.
- 누가 민우가 아프던 날 병원까지 데려갔나.
그리고 나는, 늘 3등 안팎이었다.
유진의 침대, 나의 침대
202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민우와 나는 에어비앤비에 묵었다. 홍대 뒷골목, 네온사인이 새벽까지 잠들지 않는 집.
민우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사이, 화장실 세면대 위에 놓인 칫솔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민우의 파란 칫솔, 그리고 연한 분홍 칫솔. 분홍 칫솔 손잡이에 새겨진 이니셜. Y.J.
유진이.
어젯밤 그녀도 여기 있었다는 뜻이었다. 민우는 침대 시트를 새로 끼웠다고 했지만, 베개 냄새엔 여자의 샴푸 향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향기를 들이마시며, 어쩌면 나는 그녀의 자리를 빌려 쓰는 것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친 민우가 나를 뒤에서 안았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속삭였다.
“유진이가 주말에 부산 가는대. 그럼 나는 너랑…”
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할 말은 뻔했다. ‘유진이가 없는 틈을 타서’ 나와 시간을 보낸다는 뜻.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가가 찡했다. 왜냐고, 그건 내가 민우에게 하던 말이었으니까.
도현의 일기장
민우의 또 다른 연인, 도현. 그는 7년 차 폴리, 연애 이력만큼이나 긴 일기장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히, 아니 의도적으로 도현의 노트북을 열어본 적이 있다. 이름 없는 텍스트 파일 하나. 2023년 3월 12일.
오늘 민우는 나랑 영화 보다가 수진이한테 전화를 받았다. ‘지금 만나자’고. 나는 영화관 로비에서 40분 기다렸다. 그리고 민우는 돌아왔다, 팝콘 하나 사와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 팝콘은 수진이가 먹던 거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팝콘을 입에 넣지 못했다.
나는 그 일기를 읽고, 이상하게도 도현이 ‘이긴’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너도 40분 기다렸구나. 그 기다림마저 서열의 일부처럼 보였다. 나는 민우와 있을 때, 유진이를 기다리게 한 적은 없었다. 그건 유진이가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증거였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폴리아모리는 공산주의가 아니다. 자유 시장이었다. 희소성의 법칙은 여전히 작동했다. 누가 더 많이 사랑받는지, 누가 더 먼저 불리는지, 누가 그의 부모에게 ‘소개’되는지—모두가 가격표를 달고 움직였다.
심리학자 애덤 블레이크는 말했다. “폴리 커플은 질투를 부정하지만, 질투를 계량화하는 데는 누구보다 능숙하다.”
나도 그랬다. 민우가 보내는 카톡의 답장 속도, 이모티콘의 종류, ‘좋아요’를 누른 내 사진의 순서까지. 모든 것이 점수였다.
그리고 나는, 그 점수를 세면서도 ‘우리는 평등하다’고 계속 말했다. 왜냐하면,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깨는 순간,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당신은 과연 누군가의 목록 1번이었던 적이 있나요? 아니면, 평생 2번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머물렀던 적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