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안 가득 차가운 향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서연은 구두를 벗어 던졌다. 발가락이 아파서가 아니라, 어젯밤 현준이 남긴 키스의 잔향이 목끝까지 차올라서였다.
딸기 같은데… 아니, 민트? 아니면 둘 다?
고른 호흡, 정확한 혀끝의 각도, 떨지 않는 손끝. 그는 너무 완벽했다. 12초 동안의 키스. 서연은 눈을 감고 있었지만, 눈앞에는 단 한 장면 떠오르지 않았다. 심장은 고요했다. 차라리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뛰어야 하는데… 왜…
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눌렀다. 살짝 얼얼한 자국만 남았다. 맛을 떠올리려 혀를 움직여도, 딸기도 민트도 아닌 무언가. 그저 차가운 공기만 남았다.
우연 같은 계획
어젯밤, 현준은 잠시 쉬어 가자며 뒷골목 포장마차를 들어섰다. 그는 늘 그랬다. **‘좋아하는 곳이면 어디든’**이라던 말이 사실은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어’**였다는 걸 서연은 뒤늦게 알았다. 포장마차 주인은 현준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오늘도 둘이 오셨네요?”
둘이?
서연은 잔을 들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현준은 오늘도 와이셔츠 단추를 정확히 두 개 풀어 놓았다. 그 단추 사이로 보이는 가슴살은 언제 봐도 똑같았다. 마치 포장된 선물 상자처럼.
“서연 씨, 오늘은 어땠어요?”
그가 물었다. 웃음과 함께 왼쪽 뺨에 홈이 팼다. 영화 포스터 같다. 서연은 답을 미뤘다.
“…그냥.”
“그냥?”
술잔을 들었다. 목끝으로 차가운 소주가 내려갔다. 뜨거워야 할 목 너머로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비 맞는 발끝
며칠 뒤, 서연은 지훈이와 올림픽공원을 걸었다. 오후 4시, 하늘은 갑자기 찢어질 듯이 어두워졌다. 지훈이는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계획에 없던 날씨였다.
“비 오는 거 미리 몰랐어?”
“난 계획 짜면 불안해서.”
지훈이는 말했다. 고개를 긁적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었다. 서연의 하이힐은 이미 눅눅해졌다.
“그럼… 우리 뛰어갈까요?”
“그냥 걷자.”
그가 걸음을 늦췄다. 서연은 한 걸음 뒤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비 맞은 셔츠가 투명해지면서 살이 비쳤다. 살짝 굽은 어깨선. 저 사람은 누구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겠어’**라던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발끝은 젖었지만, 심장은 그렇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뛰고 있었다. 뛰어서 아픈 것처럼. 서연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비맛과 땀, 그리고 지훈이의 뒷모습이 뒤섞여서.
이중의 불완전
저녁, 서연은 재현이와 술을 마셨다. 그는 더 유명한 에이전시 소속 디자이너였다. 하지만 첫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이혼했어요.”
서연이 잔을 내려놓았다.
“왜 이제 말해요?”
재현이는 미소를 지었다. 왼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계산된 미소. 서연은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너무 멋져서. 떠날까 봐.”
술잔이 부딪쳤다. 딸깍. 소리가 너무 크게 울렸다. 서연은 창밖을 보았다. 비는 그쳤지만, 창유리에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재현이의 이야기는 너무 매끄러웠다. 결함이 디자인된 이야기.
“그래서… 사실은 아무 문제 없다는 거죠?”
재현이는 대답 대신 술을 따라 줬다. 서연은 잔을 받으며 손끝이 살짝 닿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다. 현준보다 더 차가웠다.
누구의 불안도 여기 없구나.
내 입술 안의 너
새벽 2시, 서연은 거울 앞에 섰다. 입술을 씰룩거렸다. 딸기도 민트도 아닌 무언가. 그 무언가가 싫었다. 내가 원하는 건 뭘까?
침을 삼켰다. 목끝이 아팠다. 손을 복부에 얹었다. 심장은 여전히 고요했다. 하지만 배꼽 아래로는 미묘하게 달아올랐다. 그 곳에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비 맞은 하이힐 끝, 투명해진 셔츠, 차가운 손끝.
그리고 문득.
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나를 원하는 건가?
거울 속 자신이 말했다. 입술이 말했다. 딸기도 민트도 아닌, 아직 맛보지 못한 무언가.
창밖으로 새벽 공기가 스며들었다. 서연은 문을 열었다. 아직 아무도 없는 거리. 하지만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든. 불완전한 발걸음, 젖은 하이힐, 혹은 차가운 손끝.
그리고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