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셔츠의 주름이 끝나는 곳
밤 열두 시, 강남 고시원 7층. 한 칸의 불빛만이 아직 살아 있다. 김준혁(28)은 와이셔츠를 벗지 않은 채 침대 끝에 앉아있다. 넥타이만 느슨하게 풀어놓았다. 스마트폰 화면이 눈을 번쩍이게 한다.
오늘도 매칭은 ‘읽씹’이었다.
프로필 문구는 여전하다. ‘가치관이 건전한 여성 / 페미 사양 / 결혼 전까지 정숙’. 그러나 화면 위쪽에 붉은 숫자 0이 찍혀 있다. 채팅창 아래로 회색 체크무늬만 남는다.
준혁은 ‘레드필 여혐 갤러리’를 연다. 오늘의 인기글 제목은 <순결은 거짓말이다>. 댓글 200개, 공감 1.2k. 그 글 안에는 이미지 한 장이 첨부되어 있다. 흰 드레스 입은 여성이 울고 있는 모습. 위에 붉은 글씨로 ‘너도 결국 똑같았지?’ 새겨져 있다.
전통적인 여자는 왜 이제 없는 거야?
그 질문 아래 댓글들이 줄을 잇는다.
- "ㅋㅋㅋ 또 손으로 해야지"
- "페미년들 때문에 시장 망했네"
- "혼자 하는 게 결국 제일 깨끗해"
수진, 혹은 첫 번째 흔적
대학 2학년, 캠퍼스 뒤편 벤치. 수진(24)과 준혁은 손을 맞잡고 있었다. 손등 위에 내려앉은 햇살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수진은 준혁의 수트를, 준혁은 수진의 머리끝을 바라보았다.
"너는 철학이 있어서 멋져."
졸업반이 되던 해, 수진은 해외 연수를 떠났다. 돌아온 뒤 그녀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유럽에서 내가 달라졌어. 솔직히 말하면… 첫 경험도 했고.”
준혁은 그날 밤 술을 마셨다. 술잔이 비워질 때마다 ‘레드필’의 주소창이 깜빡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곳에 글을 올렸다. 제목은 <순결은 거짓말이다>. 그날 이후, 여성 혐오는 그의 ‘지식’이 되었다.
유진, 혹은 두 번째 흔적
2023년 5월, 모 대기업 17층 면접장. 준혁은 면접관으로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고 유진(26)이 들어왔다. 브라운 재킷, 검은 구두. 이력서 위 스펙은 화려했다. 영어 900점, 인턴 3회, 해외 봉사 2회.
면접이 끝나자 준혁은 회사 게시판에 익명 글을 올렸다.
‘오늘 지원자 중 페미년 하나 봤다. 표정이 너무 당당해서 역겨움.’
댓글 72개. 모두 ‘레드필’에서 온 동지들이었다. 그날 밤, 그는 유진의 SNS를 스크랩했다. 사진을 확대하며 혼잣말한다.
아직 솔로인 것 같아.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망가뜨리겠지.
화면 너머로 들려오는 숨소리
준혁은 하루 두 번씩 ‘레드필’을 연다. 댓글마다 첨부된 짧은 동영상이 있다. 여성 혐오 짤, 성적 조롱, 가상 대화체 에로물. 그는 가장 많이 본 영상을 즐겨찾기 해뒀다.
제목: <페미녀가 여사친에게 찍혔을 때 벌어지는 일>, 1분 30초. 여성이 운다. 주인공은 거울을 보며 웃는다. 이 영상을 보며 그는 늘 같은 말을 한다.
“쟤네도 결국 원하는 건 나잖아.”
화면 속 욕설이 피부에 닿는다. 그의 숨소리가 침대 끝까지 닿을 때, 욕망은 저주처럼 반복된다. 혐오와 발기는 근처에 있다. 두 감정 모두 상대를 ‘객체만’ 남겨놓기 때문이다.
준혁은 내일 아침 7시 반, 2호선 지하철을 탄다. 침대 끝에 앉아 다시 흰 와이셔츠를 챙긴다. 넥타이 매듭 위에 침이 묻지 않도록 조심스레 고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욕망이 끝내 나를 얼마나 더 망가뜨릴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스마트폰 화면이 또다시 켜진다. 여성 혐오의 욕설이 쌓여간다. 그 위로 그의 오른손이 내려간다. 고시원 벽 너머로 들려오는 옆방의 숨소리, 모두가 같은 욕망의 잔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