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똑같은 얼굴이야"
지하철 2호선 끝자락, 종로3가역. 지하 30미터 아래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스멀스멀 발끝을 타고 올라온다. 퇴근길 전철 안, 지민이 고개를 돌리자 준수의 옆얼굴이 닳아 없어질 것처럼 익숙하다. 같은 자리, 같은 눈빛, 같은 미소. 312일째.
지민은 문득 입을 열었다. 오늘도 똑같은 얼굴이야.
준수는 피식 웃으며 대답한다. 좋은 거잖아, 익숙하다는 건.
그 말 속에 담긴 지루함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지민은 시선을 피해 창밖을 본다. 어둠 속에 비친 자신의 반사상이 옅게 흔들린다. 그 흔들림이 곧 자신과의 관계가 허물어지는 소리처럼 여겨진다.
이름 모를 갈증
어젯밤, 지민은 잠들기 직전 문득 이불 끝을 꼭 쥐었다. 침대 옆에 누워 있던 준수는 이미 똑같은 체온, 똑같은 숨소리를 흘려보냈다. 그 고요가 불길했다. 관계란 처음엔 가슴이 터질 듯 달아오르다가, 이제는 미지근한 물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왜 더 이상 떨지 않는 걸까.
지민의 심장은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네가 원하는 건 안정이 아니라 불안이야." 불안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습관이라는 문장이 어김없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녀는 몸을 살짝 돌려 준수의 가슴에 귀를 대었다. 똑같은 박동이 똑같은 속도로 울린다. 심장마저 익숙해졌다.
한수의 눈동자
한수는 29살, 대기업 홍보팀. 11개월 전, 미팅 어플에서 만난 유진과 단숨에 꽂혔다. 첫 만남에서 그녀는 "저는 하루 두 번씩 새로움을 찾아다녀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한수는 그 눈빛에 홀려 2주 만에 동거를 제안, 6개월 만에 청약까지 꿀렸다.
그러나 지난 달, 유진의 눈에 반짝임이 사라졌다.
오늘은 뭔가 다른 거 없어?
...그냥 퇴근했어.
대답이 짧아지고, 침묵이 길어졌다. 어젯밤 유진은 화장실에서 30분을 보냈다. 한수는 문 앞에서 귀를 대었다. 휴대전화 화면 터치 소리만 들렸다. 누군가에게 새로운 반응을 구걸하는 소리였다.
한수는 침대 끝에 앉아 눈을 감았다. 과거 11개월이 플래시백처럼 훑고 지나갔다. 첫 키스, 첫 여행, 첫 다툼, 첫 화해. 그 모든 첫 시간들이 지금은 지긋이 닳아 없어진 사진처럼 느껴진다. 그는 유진이 화장실을 나오자, 조용히 물었다.
우리... 끝난 거야?
유진은 칫솔을 내려놓고 한수를 마주쳐다. 모르겠어. 그냥... 뭔가 사라진 것 같아.
성욕이 식기 전에 시작되는
인간은 안정과 새로움 사이의 끊임없는 진자운동에 놓여 있다. 뇌과학자들은 사랑의 1년 시한을 설명한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닌이라는 화학물질이 처음 12개월간 최고치를 찍고, 그다음은 하강 곡선을 그린다고. 그러나 우리가 놓친 지점은 화학이 아니라 심리라는 데 있다.
사랑이 식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방식이 식는 것이다.
한수는 1년 차가 되자 유진에게 예전처럼 아침마다 눈을 맞추고 키스하지 못했다. 어색함이 생겼다는 게 아니라, 필요가 없어졌다는 느낌. 지민은 준수에게 이제는 "사랑해"라는 말 대신 "밥 먹었어?"라고 묻는다. 단어는 바뀌었지만, 그 이면에는 욕망의 종말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종말을 차갑게 목도한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깨뜨릴까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는 얼음 위에 서 있는 기분이 된다. 언제 처박을지 모르는, 하지만 아무도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빨간 끈
징후는 미세하다. 카톡 답장이 5분 늦어지는 것부터 시작된다. 영화 한 편을 끝까지 챙겨보지 않는다. 손을 잡을 때 손등이 아닌 손가락 끝만 스친다.
지민은 어젯밤 꿈에서 준수를 잃어버렸다. 말없이 걸어가는 뒷모습. 외칠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었다. 잠에서 깨자 뺨이 축축했다. 준수는 그대로 곁에 있었지만, 이미 멀어져 있었다.
한수는 유진의 휴대폰 배경화면을 발견했다. 6개월 전 자신과의 사진에서, 유진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빛이 다르다. 그 눈빛 속에는 지금의 한수를 바라보는 눈빛이 없었다. 그날 한수는 퇴근길에 문득 지하철에서 내렸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자신도 모르게 끊어진 빨간 끈을 주웠다.
불꽃이 꺼지는 소리
연애 1년차의 끝은 조용하다. 연애 초반에는 다툼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차라리 다투고 싶다. 왜냐면 싸우는 것마저 관심이기 때문이다. 미움도 사랑의 변주라는데, 무심함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잃는 게 아니라, 서로를 깨닫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누구도 먼저 말하지 못한다. "나는 네가 지겹다" 혹은 "나는 네가 싫어졌다" 대신, 침묵을 택한다. 어차피 관계가 끝나는 건 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말이 없어지면서 끝난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대로 둘까, 무너뜨릴까
준수는 다음 날 아침, 지민에게 인사 없이 출근한다. 문을 나서면서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지민은 냉장고 문을 열어 물 한 병을 꺼낸다. 입이 말라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순간을 채우기 위해.
한수는 퇴근 후 유진을 기다린다. 유진은 30분이나 늦게 들어온다.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한다. 문이 닫히는 소리, 물소리, 칫솔질 소리. 그 모든 소리들이 끝을 고하는 종소리처럼 울린다.
누군가는 이렇게 묻는다. "1년이 지나면 반드시 끝나는 건가요?"
아니다. 다만 우리는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1년이 되면, 우리는 끝을 기다리는 공범이 된다.
당신은 지금, 1년이 지난 연인의 눈빛 속에서 무엇을 찾고 있나요?
그건 아마도, 사라진 '나' 의 실루엣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