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침대 위에서 그가 내뱉은 첫 단어는 “순종”이었다

문이 잠기는 0.3초, 봉사활동 천사가 침대 위 독재자로 변신한다. 달콤한 포도맛 뒤에 숨겨진 ‘착한 강박자’의 사슬이 드러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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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서 그가 내뱉은 첫 단어는 “순종”이었다

침대 위에서 그가 내뱉은 첫 단어는 “순종”이었다

철컥, 문이 잠기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침대 머리맡 스탠드를 꺼끄러뜨리는 것이었다. 민아의 손목을 침대 헤드에 누르는 순간, 그의 숨소리가 귀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따끔한 숨결, 눈앞이 아닌 고막 안쪽에서 울리는 듯했다.

“천천히.”

한 음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는 민아의 가방에서 나온 머플러를 천천히 풀어헤쳤다. 실내조차 어대워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머플러가 풀리며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간질었다. 민아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감았을 때보다 떴을 때가 더 어두웠다.


카페 모서리 테이블, 민아는 핫초코를 입에 댔다 뱉었다를 반복했다. 잔이 떨리는 바람에 초코가 입술에 달라붙었다. 그는 언제나 뒤에서 어깨를 토닥이던 손이었다. 지금은 머리카락을 한 줌 움켜쥐었다.

“어차피 너도 알잖아, 니가 먼저 좋아했잖아.”

순간, 그의 손가락 끝이 민아의 이마를 타고 내려왔다. 봉사활동 땐 늘 뒤에서 조용히 어깨를 토닥이던 손이었다. 지금은 풀어지지도 않았다. 민아는 눈을 깜빡였다. 눈꺼풀이 닿을 때마다 눈물이 맺혔다 떨어졌다.


그는 진짜로 착했다. 카페 알바생에게 팁은 항상 50퍼센트, 지하철역 노숙자에게 빵은 늘 한 박스. 채팅창엔 이모티콘 두 번은 고정이었다. 그래서 민아는 처음에 안심했다. 착한 남자는 상처를 주지 않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러나 착함은 포장지였다. 부드러운 종이를 벗겨내니 그 안엔 측은지심의 사슬이 들어 있었다. 내가 착하니까 너도 나에게 착해야 한다는, 반복되는 협박. 민아가 한 번만 토를 달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배려했는데, 너는 나를 배려 안 하나요?”


고개 끄덕인 순간, 계약은 끝났다. 지은은 3개월 전, 회사 동아리 후배 ‘현우’에게서 프러포즈를 받았다. 벚꽃 길을 걸으며 현우가 건넨 말, “나는 연애할 때도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지은 님이 편안하게만 해주세요, 제가 다 할게요.”

그래서 지은은 편안했다. 어디를 갈지, 뭘 먹을지, 영화는 무엇을 볼지 모두 현우가 정했다. 그러나 문이 닫히면 현우는 점점 더 정확한 지시를 내렸다. 오늘은 이 옷 입어야 한다고. 친구들과의 약속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고.

지은은 일기장에 비밀 부호를 썼다. “착한 척”이라는 글자는 “눈감기”라는 기호로. 그날 이후 지은은 잠들기 전마다 시계를 확인했다. 현우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를 확인하고, 안 읽음 처리로 돌려놓았다.


민아가 흔들리는 침대 위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이번엔 발가락을 하나하나 맞춰 움직이며 낮게 속삭였다. “발버둥 떨면 네가 나쁜 사람 되는 거야.” 침대 시트에 새겨진 주름이 그 말처럼 잔인했다.

착한 남자는 첫 맛이 포도맛이라 위험하다. 달콤한 캐러멜 안에 숨겨진 건 의무감의 독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남자에게 ‘친절한 강박자’라는 별명을 붙인다. 정작 자기 욕망은 봉인한 채, 상대에게 대리만족을 요구하는 기형적 구조.

나는 희생했으니 너도 희생해줘야 해

이 문장은 늘 반으로 쪼개져서 전달된다. 앞부분은 미소 뒤에 숨겨지고, 뒷부분은 눈빛으로 슬슬 드러난다. 여자들이 속삭이는 이유다. 그가 처음엔 정말 착했거든요. 그러다가 갑자기 달라졌어요.


정말 착했던 게 맞을까. 아니면 당신이 착하길 바랐던 거야.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사소한 강박을, 당신은 언제쯤 억지로 해석했나. 지금 이 순간, 당신 곁에 있는 그 ‘착한’ 남자. 그가 하는 고백을 다시 들어보자.

내가 너를 지켜줄게 라는 말이, 혹시 지휘할게라는 오타는 아니었나.

민아는 침대 시트를 보았다. 차가운 실리콘 냄새가 났다. 머플러가 풀린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발가락 사이로 시트의 주름이 파고들었다. 민아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실리콘 냄새가 폐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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