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너머 떨어진 블랙 레이스
이삿짐 정리를 마치고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간 베란다. 3층 단지 맨 끝, 내가 살게 된 첫 보금자리. 연초록 잔디와 새 파란 페인트 냄새가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려는 순간.
"아, 씨..."
옆집 베란다. 검은 레이스 브라가 의자 다리에 걸려 흔들린다. 방금 떨어뜨린 건지, 아니면 진즉 잊어버린 건지.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 살짝 열린 미닫이문 틈으로 보이는 하얀 종아리. 내 시선이 그 선을 따라 올라가는 0.5초 동안, 문이 닫히면서 쿵.
그리고 30초 후, 다시 열린다. 그녀가 나와. 짙은 네이비 가운을 어설프게 걸치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나를 본다. 아무 말 없이 브라를 집어 들어간다.
하지만 그날 밤, 우리 집 현관 손잡이를 살짝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왜 잠금장치를 풀어뒀을까
혹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결혼 6년차, 시드물만 남은 서른다섯의 그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남편과 함께 새벽 산책하던 모습이 CCTV에 잡혔다. 이 단지 사람들은 그녀를 ‘예쁘게 사는’ 아내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알게 됐다. 그녀가 새벽 3시 20분, 남편이 출장 간 날마다 거실 불을 껐다 켰다는 걸.
욕망은 그렇게 시작됐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누군가의 것’**이란 금기의 틈새를 응시하는 쾌감. 나도 모르게 CCTV 화면을 돌려봤다. 그녀가 아침 7시, 모르는 남자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다 나온 적은 없었다. 하지만 정문 앞 편의점에서 혼자 소주 한 병을 사 들어가는 모습은 여러 번.
결국 그날도, 그녀는 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500ml 생수 한 병.
“우리집 정수기가 고장났대요.”
민서의 목요일, 우리의 19일
그녀의 이름은 민서. 남편은 주로 수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출장 간다. 19일 전, 수요일 새벽 2시 17분. 민서는 처음으로 내 집 현관 벨을 눌렀다.
문을 열자 향긋한 샴푸 냄새가 확 쏟아졌다.
“혹시 라면 하나 있어요?”
우리는 라면 둘을 끓였다. 그녀는 파를 안 먹는다고 했고, 나는 계란을 두 개 넣었다. 불앞에 서서 숟가락을 돌리는 손끝이 살짝 떨렸다. 라면이 끓는 4분 동안, 우리는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단지 끓는 물소리와 숨소리만이 흘렀다.
그녀는 먹고 나서 식탁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다음엔 제가 끓여드릴게요.”
그날 이후, 매주 목요일 새벽 2시가 되면 내 현관문은 살짝 열렸다. 그녀는 올 때마다 다른 향수를 뿌리고 왔다. 하지만 결국 떠날 때는 늘 같은 냄새를 품고 갔다. 피곤한 아침 햇살 속, 그건 내 집 안에 남겨진 유일한 증거였다.
일주일 전, 우리는 마주쳤다. 지하 주차장. 그녀와 나, 그리고 그녀의 남편까지 세 명이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다. 남편은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이사 오신 분이시죠? 한 달만에 뵙네요.”
민서는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을 만졌다. 1초 뒤, 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오늘도 2시. 라면 끓여줘.]
우리가 금기를 사랑하는 이유
‘도둑질은 재미있지만 걸리면 끝장이다’ 라는 속마음이, 어쩌면 가장 솔직한 욕망의 핵심일지도.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금기는 뇌의 도파민 회로를 자극한다고. 하지만 그건 과학자의 변명일 뿐이다. 우리가 진짜 원하는 건, ‘누군가의 것’을 훔치는 순간 느끼는 전율이다. 결혼반지가 낀 손가락, 교복 단추 하나 풀어헤친 교실, 닫힌 침실문 너머 들리는 낯선 신음.
민서는 나에게 말했다.
“남편이랑 싸우고 나오면, 라면이 제일 먹고 싶어요. 화해하려면 비싼 식사를 해야 하잖아요. 근데 라면은... 그냥 배를 채우는 거니까.”
그래서 우리는 라면 끓이는 시간을 끌었다. 4분이면 끓어 넘치지만, 우리는 8분을 기다렸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답할 수 없다. 다만, 민서는 늘 라면을 두 숟가락만 먹고 남겼다.
“배불러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배는 라면 때문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걸.
잠금장치를 다시 걸 때
오늘도 2시.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는다. 새벽 2시 17분, 민서는 오지 않았다. CCTV를 확인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다.
혹시, 그녀는 그날 이후로 영원히 오지 않을까. 아니면, 남편이 문을 잠갔을까. 아니면, 그녀는 더 이상 라면이 먹고 싶지 않은 걸까.
이삿짐 상자 하나가 아직 열어놓은 채다. 그 안에는 민서가 남긴 블랙 레이스 브라가 들어 있다. 처음 베란다에 떨어졌던 그것.
나는 이제 매주 목요일 새벽 2시에 현관문 앞을 지킨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하지만 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그건 아마, 내가 직접 잠근 욕망의 메아리일 테니까.
당신이라면, 잠금장치를 다시 걸 수 있을까. 아니면, 영원히 열어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