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주연이 잠든 뒤 거실 조명을 한 칸만 낮춘 채로 우리는 말했다.
—차라리 네가 봤던 사람이면, 소개라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내 수진의 손에 든 와인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레드가 잔등을 타고 흘러내려 카라페 아래까지 붉은 자국을 남겼다. 나는 문득 그 자국이 키스 자국 같았다.
—정식으로 만나고 싶어. 내가 너에게 뭘 숨기고 싶지 않아서… 그래도 돼?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뜨거운 심장이 목끝으로 번졌다. 그건 아마 분노가 아니었다.
뜨거운 한 모금
그가 어떤 입술로 그녀를 문지르고 있을지 상상한 뒤 내가 느낀 것은 정확히 배신감이 아니었다. 더 어두운 무언가. 질투와 흥분이 뒤범벅된 혼돈.
우리는 ‘오픈 마인드’라는 말로 시작했다. 결혼 7년 차, 각자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다고 해도 관계의 중심축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 믿었다. 수진은 용기 있었다. 꽃다발처럼 낯선 남자의 향기를 집 안으로 가져오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그 선언이 단순한 ‘허용’이 아니라 ‘시험’처럼 느껴졌다.
내가 진짜 궁금했던 건 이거였다. 나는, 과연, 얼마나 참을 수 있을까.
손끝으로 확인한 거리
실제로 그렇게 된 부부들이 있다.
김도현(39)·배서영(36)·최준우(34) 부산 남천동의 고층 아파트, 커튼 사이로 넥타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도현은 아내 서영의 새 연인 준우에게 커피를 내밀며 말했다.
—사람 좋아 보이네, 너.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 없어. 그녀가 좋아하는 건 내가 먼저 알았으니까.
준우는 잔을 내려놓는 순간 손등이 살짝 떨렸다. 도현은 그 떨림을 봤다. 그 순간 숨기고 있던 또 다른 감정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저 남자도 지금 두려워하고 있구나.’
서영이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두 남자는 마주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숨죽인 방 안, 시계 초침 소리만이 서로의 심장을 세고 있었다.
단 한 번의 허락
그러나 막상 실제로 문이 열리면?
이혜린(35)의 익명 내밀고백
나는 남편 앞에서 연인 지수의 손을 잡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심장 밑바닥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렸다. 남편의 시선이 내 손등에 닿는 순간, 나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살아 있었다는 걸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끄덕임은 ‘괜찮아’가 아니라 ‘계속해 봐’였다.
그날 이후 집 안에선 누구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혜린, 지수, 남편. 모두 대명사로만 서로를 불렀다. ‘당신’ ‘너’ ‘자기야’. 그것이 곧 영역 표시였다. 침묵이 쌓일수록 방 안의 공기는 무거워졌다. 누군가의 숨소리만으로도 살이 뜨거워졌다.
몸으로 번져오는 지도
우리는 왜 이 끔찍한 장면에 끌리는 걸까. 실은 금기와 집착 사이, 그 어디쯤에 잠복해 있는 본능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스텐버그는 사랑을 ‘친밀감+열정+헌신’이라 분해했지만, 여기서 빠진 게 있다. 위험 자극이다. 뇌는 위험을 감지하면 도파민을 분비한다. 동시에 배우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옥시토신을 폭발시킨다. 결국 우리는 ‘잃을 수도 있다’는 죄수의 심장박동을 즐기게 된다.
친구 몇 명은 나에게 조언했다.
- 그냥 허락하지 마.
- 속이 타서 죽을 거야.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속이 타오를 때, 불꽃이 내 눈동자에 비치는 것을.
아직 닫히지 않은 방
오늘 저녁, 문 앞에서 수진이 신발을 고르고 있다. 검정 로퍼와 갈색 스웨이드.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스웨이드를 골랐다. 발레리나처럼 발등을 구부리는 순간, 나는 그 뒤꿈치에 입맞추고 싶어졌다. 아니, 입맞추는 대신 무릎 꿇고 싶어졌다. 제발, 돌아와.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꺼내지 못했다.
대신 나는 물었다.
—어디서 만날래? —그가 좋아하는 술집. 우리가 처음… 아, 그냥. 그녀는 문 손잡이를 돌렸다. 잠금 장치가 톡김 소리를 냈다. 살아 있는 심장이 잠그는 소리처럼.
문이 열리기 직전
당신이라면, 그 키를 돌리겠는가. 아니면, 영원히 닫아 둘 것인가.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문은 이미 열렸고, 당신도 그 안으로 발을 들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것은 누구의 숨소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