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 밤, 머플러 안쪽에 숨은 가격표
말차 파운드 한 입 먹던 김서연이 갑자기 다이닝 예약 앱을 슬쩍 뺏었다.
“여기, 카드는 내가.”
그 순간 나는 냄새를 맡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손목에서 풍겨 나오는 깊은 가죽향 뒤에 숨은 돈 냄새. 검정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플래티늄은 아니었지만, 한 달 사용액 300만 원을 훌쩍 넘기는 카드였다. 그 냄새는 달콤했다. 아니, 썩은 말차처럼 쌉싸름했다.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 거지?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파운드 케이크 1만 9천 원, 와인 18만 원, 24개월 숙성 스테이크 12만 9천 원. 이 모든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결제하는 그의 손가락. 그 손가락이 내 허리를 스칠 때, 나는 내가 얼마짜리인지 계산했다.
2. 지하주차장, 02:14
박수진, 29세, 압구정 모 브랜드 매니저. 토요일 밤, 인스타그램 속 ‘갓남편’ 박준혁과 첫 데이트였다. 장소는 청담동 루프탑 갤러리바. 대관료만 500만 원이 넘는 곳.
“여기… 대관료가 얼마죠?” “별로 안 해. 그냥 친구가 운영해서.”
나중에 알았다. ‘친구’는 사실 그의 자산관리사였다. 그날 밤, 지하주차장 포르쉐 카이엔 안에서 처음 키스했다. 어두운 창문 너머로 보이는 롤렉스 데이토나, 시세 5,000만 원.
“내일 스위스 가야 해. 비즈니스.” “언제 돌아와요?” “일주일? 아니면 한 달?”
한 달 뒤, 그녀는 그의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 ‘5872’를 외웠다. 그는 여행 중이라 한 번도 못 만났지만, 수진은 그 번호를 외우는 순간 자신의 미래를 샀다.
3. 대관식 룸살롱, 03:07
최예린, 34세, 회계법인. 스무 살 차이 연하남과의 비밀연애. 그는 이사장 손자, 어린 시절부터 자동차 5대를 번갈아 타며 자랐다. 그녀는 그를 ‘아기사자’라 불렀다.
“언니, 이거 봐. 오늘 할머니가 또 5억 쏘셨어.” “뭐 샀어?” “그냥… 미술품이랑 시계 몇 개.”
휴대폰 알림은 끊임없이 울렸다. ‘카드 사용 한도 초과’, ‘연체 안내’. 그는 흔들렸고, 예린은 그 흔들림 속에서 기회를 봤다. 어린 호랑이를 길들여 언젠가 더 큰 호랑이를 부를 날을.
어느 토요일, 대관식 룸살롱. 아기사자는 다이아 반지를 내밀었다. 1.2캐럿. 그 반지는 3개월 전 전 여자친구에게 주려다 말았던 것이었다. 예린은 알았다. 그래도 손가락에 끼웠다. 다음은 나 차례야.
4. 속물의 가슴은 누가 측정하나
옛날에는 속물이 되는 게 부끄러웠다. 지금은 인스타그램 하이라이트가 그 부끄러움을 대신한다. ‘부자 남친 인증샷’, ‘명품 백 선물’. 과거의 금기는 오늘날의 ‘브랜딩’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구도 그 브랜딩에 발을 담그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5. 너는 정말 그의 숫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숫자 속 너를 원하는가
당신은 지금 누군가의 재력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스스로를 끌어당기는 구체적인 숫자를 떠올리고. 그러나 한 번만 곱씹어보자. 네가 원하는 건 ‘그’가 아니라 ‘그의 100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100억 속에 담긴 너의 10년 뒤 모습, 그걸 사실 원하고 있는 건 아닐까.
돈 냄새에 눈을 뜨는 순간, 당신은 과연 사랑을 원하는가, 아니면 사랑을 빌려 더 큰 자신을 만들 용기가 없어서 돈을 안전핀 삼으려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할 때,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라. 우리 모두 어딘가에선 똑같은 냄새를 맡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