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 네가 입을 벌리고 있어. 손가락으로 자신의 안쪽을 살짝 벌리는 그 찰나, 침대 머리맡에 걸린 옷장 문에 비친 네 모습이 화면에 잡힐 것만 같지 않니?
맞아, 지금 내가 본 건 정사각형 스마트폰 화면이 아니야. 흐릿한 유리 너머로 내가 남의 것처럼 보인다.
이불 속 첫 번째 시청자
주현은 아이폰 카메라를 켜고 수건을 벗었다. 채팅창이 쌓이는 동안 침실 거울을 힐끗거렸다. 27인치 모니터만 했던 전신거울, 그 속 주인공이 지금 스스로를 찍고 있었다. 실시간 스트리밍은 아니었다. 그래도 누군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떨림이 온몸을 핥았다.
‘이거 찍으면 나도 포르노배우야.’
화면 속 그녀의 가슴은 하얘 보였다. 스튜디오 조명이 아니라 거실 형광등 하나. 그런데도 그녀는 유리 뒤에 서 있는 자신을 ‘작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살짝 벌린 다리, 눈을 감지 않은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눈빛까지.
욕망의 셔터 소리
거울은 카메라보다 잔인하다. 초점이 맞지 않는다고 해도, 잘라내지 않는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의 뱃살, 잔주름, 색다른 점까지 그대로 비춘다. 그래서 우리는 더 각을 세운다. 엉덩이를 뒤로 빼고, 허리를 꼬인다.
나는 남들이 날 봤으면 좋겠다. 동시에 누구도 날 봐서는 안 된다. 이 모순이 거울 앞에서 가장 날카로워진다.
욕망의 핵심은 ‘포르노 주인공’이라는 이미지다. 우리는 주류 산업이 만들어 놓은, 화려한 조명과 젖은 피부를 가진 ‘그’ 혹은 ‘그녀’를 떠올린다. 그러나 실은 ‘나도 저런 시선의 중심에 서고 싶다’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가 보는 나를 다르게 보고 싶다’**다.
거울 앞의 시선은 두 개다. 첫 번째는 네가 너를 보는 나른하고 익숙한 시선. 두 번째는 네가 상상하는 남의 시선. 후자는 갑자기 너의 윤곽을 날카롭게 만든다. 너는 네 몸이 남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순간을 시뮬레이션한다. 그래서 더욱 화끈해진다.
리나의 삭제된 파일
리나는 연휴 동안 에어비앤비에 묵었다. 화장대 위 전신거울이 빠삭하게 달려 있었는데, 딱 한번 문을 열어 놓으니 침대 전체가 비쳤다. 첫날 밤, 그녀는 남자친구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키스가 무르익자 눈에 거울이 들어왔다.
‘우리가 지금 딱 포르노야.’
그녀는 남자친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자신이 거울 속에서 어떤 각도로 비추일지 살폈다. 뒤에서 받치는 동작, 자신의 한쪽 다리를 벽에 걸치는 모습이 딱 ‘그 영화’처럼 보였다. 성적 쾌감보다는 ‘누군가가 이걸 촬영하고 있으면’이라는 환상이 더 컸다.
다음 날, 리나는 홀로 거울 앞에 섰다. 스마트폰 4K 카메라로 자신을 찍었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 입술에 묻은 침. 그녀는 그동안 봐왔던 포르노 클립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나도 저렇게 보일 수 있을까’가 아니라 ‘내가 지금 저렇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들떴다.
그 영상은 3초 만에 휴지통으로 갔다. 삭제 조차도 흥분의 일부였다. 영원히 지워진다는 사실이 숨겨진 관음의 끈을 더 단단히 묶었다.
아무도 모르는 관객
우리는 왜 우리를 ‘남’이라고 상상하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나’라는 존재는 늘 익숙해서 재미없다. 반면 ‘남’은 익명이고, 갑작스럽고, 때로는 폭력적이다. 그래서 흥분한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관음-전시 콤플렉스’라고 부른다. 남이 나를 기웃거린다고 믿는 순간, 평범했던 일상은 순식간에 무대가 된다. 네가 머리를 감는 모습조차 관객 앞의 연기가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네가 상상한 관객은 너의 기준에 맞춰 조명을 설치하고, 각도를 정한다. 누군가가 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너는 누군가에게 보이도록 너를 재편집한다. 결국 네가 사랑하는 것은 네 몸이 아니라, 네 몸이 만들어낸 영화다.
끝에 던지는 한 점의 접선
거울 앞에서 다시 한번 옷을 벗어보자. 이번엔 아무 상상도 하지 말고, 그저 눈동자 속 자신을 들여다본다. 네가 포르노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던 건, 네가 너를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지 못해서야. 그래서 상상 속 남을 끌어들인 거야.
그렇다면, 내가 내 몸을 원하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그 질문에 답할 때까지, 거울 앞의 너는 여전히 관객 없는 무대 위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