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우리는 굳이 결혼이 필요 없지 않을까?” 찻잔 앞에 놓인 서류 한 장. ‘재산 공동 관리 및 상속 포기 각서’라 적혀 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결혼은 하지 않겠다면서, 내 재산을 관리하고 싶다고?
미래 없는 영원
그는 결혼을 거부하고도 연애의 모든 혜택을 누리려 한다.
결혼이라는 틀은 싫지만, 남들이 ‘아내’라 부르는 그 위치는 끌린다. 결혼은 ‘올인’이라 해서 부담스럽지만, 사랑의 끝에 ‘반쯤’ 가지는 건 괜찮다고 믿는다. 약정서는 그래서 태어났다. 결혼은 안 하지만, 내 돈은 함께 쓰고 싶다는 궁색한 변명.
“민호야, 너랑 나랑만 맺는 약속이면 돼”
서울 서초동의 한 고급 와인바. 민호는 태은에게 A4 용지 한 장을 내밀었다.
‘우리는 결혼을 하지 않으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재산을 공동 관리한다. 태은의 부동산 및 현금 자산의 일정 비율은 민호 명의로 이체되며, 상속은 배제한다.’
태은은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러니까 난 공인열부인으로 남고, 넌 내 돈을 관리하는 남편 없는 남편이 되는 거야?” 민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법률적 번거로움 없이 서로를 지켜줄 수 있잖아.” 그날 밤 태은은 집에 돌아와 서류를 찢어버렸다. 민호는 다음 날 카톡으로 물었다. ‘오늘 저녁? 와인이 또 생겼어.’ 부르는 게 아니라, 부른 척하는 목소리.
“혼자인 척 해도, 네 건 내 것”
2023년 10월, 인천시 부평구의 한 원룸. 수진은 7년째 동거 중인 ‘친구’ 준혁에게서 같은 제안을 받았다.
‘우린 서로를 아는 사이니까, 서류 따위가 뭐 중요한가. 대신 집값 떨어지기 전에 내 이름으로 대출 좀 받자.’
준혁은 수진의 명의로 된 아파트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은행 대출 한도까지. 그것도 모자라 수진의 부모님이 물려준 전답까지 담보로 넣자고 제안했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잖아.” 수진은 그날 준혁의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동호회 단톡방에서 준혁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백수지만 집 한 채 있어서 걱정 없음. 결혼은 귀찮은 거 보면 싫어서… 일단 살다 보면 내 이름으로 바꾸든지… ’
왜 우리는 이 말에 속는가
사랑한다는 말에, 혹은 ‘함께 미래를 꾸린다’는 말에, 우리는 왜 지갑을 열까?
결혼은 두 개의 주민등록번호를 하나로 묶는 공포. 그 공포를 피하면서도, 혼자인 척하는 두려움은 버릴 수 없는 사람들. 결혼 대신 약정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우리는 특별하니까’라는 내러티브를 만든다. 결국 재산을 넘기는 순간, 관계의 주도권도 고스란히 넘어간다.
애초에 그들이 원하는 건 결혼이 아니라, 혼자가 아닌 척하는 완벽한 핑계였다. 너의 돈은 내 것, 나의 빚은 네 빚.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이혼도 없다. 그래서 끝날 때 물러설 길도 없다.
오늘 밤, 너의 잔고를 확인해보라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연인이 당신 명의의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있지는 않을까? 혹은 당신이 그의 통장을 확인할 용기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