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사랑은 접어도 침실만큼은 끝내 버리지 못했다

연애는 끝났어도 누군가의 침실 냄새를 맡으며 잠드는 그대. 사랑을 포기했다고 떠벌렸지만 정작 원하는 건 연인의 체온이 남은 침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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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전부 지웠어" 하고 말한 밤

다이소에서 3천원짜리 접시를 산다고 해도 30분을 고민하던 수진이, 스무 번째 고백을 뿌리치던 날 나는 침대 시트를 찢어버렸다. 하얀 린넨 위에 있던 오래된 얼룩이, 진짜 커피인지 아닌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얼룩이, 눈에 거슬렸다.

그날 밤 휴대폰에 써놓은 메모는 단 한 줄이었다.

‘앞으로 아무도 안 사랑함.’


사랑이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였다

사랑 포기 선언 뒤에도 유일하게 남은 습관은 있었다. 에어팟 끼고 지하철 탈 때마다, 갓 헤어진 커플의 인스타그램을 스크롤하는 것. 그러나 사진 속 대상은 연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침대 헤드보드 디자인. 쿠션 색상. 조명이 어느 각도로 비추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누워 있는 시트의 패턴.

그건 애정이 아니었다. 그건 실내 장식 전시회였다.
애초에 내가 원한 건 포옹이 아니라 침실의 분위기였다는 얘기다.


민재의 베개, 민재의 향기, 민재의 방향

민재를 처음 만난 건 해고 알림을 받은 날이었다. 맥주 한 캔에 취해 버스를 놓쳤고, 진절머리 나는 맛집 앞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는 그날 놀랍도록 무례했다. 이름도 안 묻고, 연락처도 안 받고, 그냥 집으로 갔다.

신호 한 번 안 하던 민재의 침실은 구석구석 정리되어 있었지만, 왜인지 실오라기 하나 건드리기 싫었다. 시계는 2시 17분을 가리켰고, 민재는 내가 눈을 뜨면 떠나 있다고 했다.

그가 남긴 건 침대 위에 던져진 후드티 한 벌. 아직도 서랍 깊숙이 넣어두고 한 번도 안 입는다. 냄새가 너무 살아 있어서.


다시, 수진의 이야기

한 달 뒤 수진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식장 사진을 보니, 그녀가 고른 침대는 내가 꿈꾸던 천장 난간형이었다. 시트는 짙은 네이비.

  • 너무 잘 살지 마.
  • 침실 사진은 찍지 마.

이모티콘 두 개, 전송. 그리고 나는 다시 접시를 사러 갔다. 이번엔 3천원짜리가 아니라 5천원짜리. 왜냐하면, 어차피 그릇은 깨질 거니까.


금기를 끌어안는 법

사랑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다른 욕망을 품고 있었다. 다름 아닌 ‘허락되지 않은 공간 침투’라는 욕망 말이다. 누군가의 침실은 그 사람의 가장 내밀한 지도다. 문을 닫고 불을 끈 순간, 그곳엔 하루의 끝에서야 드러나는 진짜 냄새, 진짜 습관, 진짜 표정이 남는다.

그래서 그 공간에 눕는 건, 그 사람의 밤을 훔치는 일이다.

연애는 끝났어도, 훔치고 싶은 건 계속 생긴다. 사랑 따위 버렸다고 자부하는 우리는 알고 있다. 버린 건 사람의 마음이고, 남은 건 그 사람이 누워있던 흔적이라는 걸.


마지막으로 묻는다

그대, 사랑 따위 포기했다고 떠벌이지만 정작 이유는 단 하나다. 당신이 원하는 건 연인의 미소가 아니라, 연인이 잠든 뒤 흘려놓은 냄새와 체온이 남아 있는 침대라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도, 당신은 누군가의 시트를 꿈꾸며 잠들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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