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초
“지금, 여기, 너의 숨결과 나의 숨결이 하나가 되는 순간.”
재현의 시야에선 모든 색이 먼저 사라졌다. 샴페인 한 모금이 코 끝에 남긴 탄산, 그르렁이는 숨소리, 뜨거운 손바닥이 차가운 허리를 훑는 미끄러짐—모두 흑백 필름으로 바뀌는 데 0.2초.
지우의 아래 입술이 살짝 떨렸다. 짧은 간격, 딱 0.5초. 그 사이 재현은 냄새를 먼저 맡았다. 비누향 섞인 먼지, 머리카락에 배어 있던 담배 잔향, 그리고 짙은 침—고개를 숙이며 뱉어 낸 한숨처럼 뒤집어쓴 불안.
순간, 입술이 떨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뚫렸다. 마치 뜨거운 철판 위에 떨어뜨린 물방울이 금방 수증기로 사라지듯, 지우의 체온이 재현의 피부를 스치고 떠났다. 공허의 형태가 아주 작은 바람구멍 하나로 드러났다. 숨이 들이켜질수록 가슴 속이 더 깊게 움푹 들어갔다. 재현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무리 봐도 그 구멍은 그대로였다.
입맞춤 뒤, 그녀의 말
지우는 숨을 헐떡이며 재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피부를 간질였다.
“너, 여기 냄새 나.”
“뭐?”
“쇳내—아, 아니. 뭔가 비어 있는 냄새.”
재현은 웃음을 흘렸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온전치 않았다.
“그게 뭔 냄새냐.”
“모르겠어. 머리카락에선 향수 냄새 나고, 손끝엔 땀 냄새 나는데… 가슴 쪽에서 흘러나오는 게 있어. 빈 숟가락에 입 대면 나는 소리. 그래.”
재현은 지우의 말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지우는 재빨리 몸을 떼어냈다. 침대 시트가 찌그러지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만하자, 오늘.”
“왜?”
“그냥, 느낌이 이상해. 네가 나를 채우려는 것 같아서.”
심장 밑, 퍼즐 조각 한 장
재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지우가 떠나면 남는 게 뭔지.
‘내가 없는 나.’
스물, 누나는 차 사고로 사라졌다. 장례식장은 시뻘건 국화 향에 잠겼다. 부모는 식탁 위에 검은 접시만 올려놓고 눈을 맞췄다. 그날 이후 재현은 허기를 배웠다. 사람을 조각으로 뜯어 먹는 법. 손톱으로 문지르며 얼마나 큰 구멍인지 가늠하고, 그 구멍에 딱 맞는 실루엣을 찾아 헤맨다.
대학 뒷골목 펍. 지우는 칵테일 한 모금에도 얼굴이 붉어졌다. 재현은 그녀의 뺨을 스쳤다.
“니가 나를 웃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그게 무슨—”
“말 그대로. 너 눈웃음 치면, 내가 좀… 편해.”
한 달, 두 달. 지우의 말투가 늘어났다. “배가 고프다”는 재현의 말에, 지우는 김밥 한 줄을 썰어 주었다. 그날 밤 재현은 꿈에서 김밥 대신 지우의 손가락을 삼켰다. 먹을수록 목끝이 아팠다. 깨어나 보니 침대 곁에 떨어진 지우의 반지가 빛났다. 재현은 반지를 주워 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연쇄 채우기
하은은 방법이 달랐다. 연쇄 채우기. 첫 남자는 ‘감정 지능’을, 두 번째는 ‘패기’, 세 번째는 ‘안정감’을 공급했다. 각자의 자리에 딱 들어 맞는 조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들이 떠나면 구멍의 모양이 변했다. 원형이 타원이 되고, 타원이 폭풍 모양으로 찢어졌다.
하은은 거실 한쪽에 유리병을 일렬로 놓았다. 각 병엔 사귀던 남자가 남긴 냄새가 담겼다. 첫 번째는 머스크, 두 번째는 솔잎, 세 번째는 우윳빛 파우더.
“여기, 내가 채운 사랑들이잖아.”
그녀는 병을 흔들었다. 향이 변했다. 머스크는 곰팡내, 솔잎은 담배 맛, 우윳빛은 비린 피로 바뀌었다.
“다 색이 변했어.”
당신이라는 빈 무대
공허는 노래처럼 울린다. 우리는 그 울림을 잠재우려 하지만, 동시에 그 울림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을 품는다. 사랑은 그래서 ‘나를 가리는 커튼’이 된다. 커튼을 걷어내면 누구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텅빈 무대가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다음 사람을 찾는다.
“이번엔 다를 거야.”
마지막 질문
그녀, 혹은 그가 떠난 뒤 당신이 느끼는 허전함—그것은 사랑의 상흔인가, 아니면 평생 감춰 온 당신의 실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