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사랑하면서도 떠나고 싶은 밤들

폭력도, 경제난도 없는데도 떠나고 싶은 밤. 결혼 8년 차 지수와 민호, 혜진이 맛보는 ‘완벽한 결핍’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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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서도 떠나고 싶은 밤들

훅(Hook)

어젯밤, 지수는 남편이 잠든 사이 조심스레 이불을 걷어 올렸다. 
결혼 8년째, 서로의 몸을 아는 것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위치를 더 잘 안다. 
그녀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내들고, 베란다에 나섰다. 발가락이 차가운 타일 위에 닿는 순간, 
문득 스멀거리는 생각. 
*이 집을 나가면 어떨까.*
아무 이유 없이.

고요한 공기 속의 방화범

거실 시계는 2시 17분을 가리킨다. 지수는 벽에 기대 맥주를 홀짝인다. 톡 쏘는 쓴맛이 목끝에서 퍼지는 동안, 그녀는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폭력도 없었고, 경제난도 없었다. 남편은 매일 퇴근길에 장을 봐 왔고, 자기 전에 반드시 머리를 감는다. 철저한 40대.

그런데 왜 이 집이 갑자기 수갑처럼 느껴질까.

욕망의 해부

인간은 설령 모든 조건이 완벽하다 해도, 자신이 이미 누려본 미래에 지루함을 느낀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허기(hunger for missing)'라 부른다. 우리는 결핍을 간직해야만 계속 살아갈 이유를 갖는다. 당신이 아침마다 남편에게 따뜻한 커피를 타주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하지 않았던 따뜻함을 갈망하는 이유다.

민호는 왜 자동차 트렁크에 가방을 싸 넣었나

작년 가을, 서른아홉 민호는 영화관 지하주차장에 차를 몰고 왔다. 아내는 집에서 잠든다. 딸은 아홉 살, 피아노 레슨이 이튿날 아침이라 늦게 잔다. 민호는 트렁크 안에 7년 전 신혼여행 때 쓰던 배낭 하나를 넣었다. 안에는 속옷 세 개, 충전기, 그리고 아내 몰래 모아둔 현금 120만 원.

차를 출발시키기 3분 전, 아내에게서 카톡이 온다. [사진] 딸아이가 오늘 그림 그린 거야. 너랑 나랑 뽀뽀하는 거. 민호는 잠시 머뭇거리다 시동을 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기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순간, 스마트폰이 또 울린다. 지금 어디야? 회사 앞이야, 시끄러워서 못 들었나 봐.

그는 차에서 내려 다시 아파트로 향한다. 배낭은 트렁크 안에 그대로. 이문을 연적 없는 소설처럼.

혜진은 매일 밤 2시 56분에 일어났다

혜진은 시계를 확인한다. 역시나 2시 56분. 남편이 쿨쿨 잘 때마다 그녀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발을 뺀다. 서재에 가서 노트북을 켠다. 즐겨찾기에 저장된 부동산 앱. 혼자 살 만한 원룸을 검색한다. 반지하도 좋다. 옥탑도 좋다. 별이 보이면 더 좋다.

어느 날은 진짜 전화를 걸어 중개사에게 “혼자 살려고요”라고 말한다. 중개사는 위화감 없이 “화장실은 공용이어도 괜찮으시겠어요?”라고 되묻는다. 혜진은 그날도 끊지 않았다. 예약만 하지 않았을 뿐.

내가 떠나려는 게 남편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야. 내 안에 있는 아무도 모르는 부분 때문이야.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사실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불안정한 안정장치다. 서약은 확실하다. 하지만 매일밈다시 인정받는 ‘나’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오래된 사진처럼 누렇게 변한 자신을 목격하고, 다음 컷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상상한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죽음충동(Thanatos)’이라는 말을 남겼다.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려 든다는 것. 결혼 생활이 너무 매끄럽다면, 우리는 그 매끄러움이 만들어낸 무지개 속에서 우리가 아닌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래서 떠나고 싶어진다. 아무 이유 없이.

문을 열고 나가면 어떻게 될까

지수는 아직도 베란다에 있다. 맥주캔이 비어간다. 그녀는 신발장 위에 놓인 차 키를 본다. 시동만 걸면 돼. 시동만. 그러나 한 걸음도 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알고 있다. 떠난다고 해도, 새벽 4시가 되면 어딘가에서 다시 ‘왜 떠났을까’를 자문하게 될 자신을.

우리는 떠나고 싶은 이유를 알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도 안다. 그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바로 결혼이다.

마지막 질문

당신도 어젯밤, 누군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득 나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가를 떠올렸다면,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그건 당신 안에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는 신호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떠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과연 그걸로, 참을 수 있을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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