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47분, 강남 코엑스 뒤 술집.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너무 침착해서 싫었다.
—오늘 누나 정말 예쁘다, 뭐 바른 거? 그가 옆자리 여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눈에 콕 박혔다. 나는 그의 와인잔을 살짝 밀어 올려주며 웃었다.
‘죽일까, 아니면 더 재미있게 만들까.’
입안에 삼킨 가시
질투는 원래 이런 거였다. 동시에 두 가지를 느끼는 능력: 살인衝동과 극도의 쾌감.
36년 동안 몸에 배어 버린 참음의 근육이 있었다. 처음엔 울었다. 둘째 해엔 소리를 질렀다. 셋째엔 그 남자의 휴대폰을 몰래 들여다보다 손에 쥐가 났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질투를 ‘놀이’로 전환하는 지점이 찾아왔다.
실종된 립스틱
작년 가을, 압구정 로데오의 브런치 카페. 상대는 6년 차 남자친구 ‘재훈’. 그날은 새로 이직한 여동료 ‘채원’의 환영 파티였다.
채원은 유난히 내 옷을 좋아했다. —언니 스타일 진짜 멋져요. 저도 저런 체크 재킷 사고 싶은데 브랜드가 뭐에요? 재훈이 대답했다. —그거 비싸. 미쳤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샐러드에 남아 있던 치킨 한 점을 내려다봤다.
이튿날 화장실 거울 앞. 내 립스틱이 사라졌다. 다홍색, 매트, 생일에 재훈이 선물한 것. 내가 아닌 누군가의 입술 위에 올라갔겠지. ‘참아야지.’ 순간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더 매력적으로 둘을 관찰할까’였다.
검은 실크 드레스
3주 뒤, 재훈의 생일. 나는 검은 실크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목 뒤에는 살짝 풀린 리본이 있었다. —와, 누나 오늘 무슨 일이야? 채원이 탄성을 질렀다.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특별한 날이니까. 술이 한 잔, 두 잔. 재훈이 화장실 간 사이, 나는 테이블 위 동전 지갑을 열었다. 채원의 신용카드 뒷면. ‘대포 카드 구나.’
나는 조용히 카드를 다시 넣어 두고, 재훈이 돌아오자 그의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채원 씨, 당신 카드 좀 볼래요? 채원이 당황하며 지갑을 받아 들었다. 재훈은 눈치챘다. —무슨 일이야? 나는 흘긋 웃으며 말했다. —그냥, 요즘 소문이 좀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려고.
우리는 왜 이 지점에 서는가
성숙한 여자는 질투를 ‘덮는’ 게 아니라 ‘도구화’한다. 심리학자 너새니얼 브랜든은 “질투는 자기 가치가 위협받는다는 신호”라고 했지만, 나는 “그 위협을 통제 가능한 놀이로 전환하는 능력”을 갖춘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주의를 빼앗긴다는 사실’*이 불쾌한 건 맞다. 하지만 그 불쾌함을 ‘상대를 더 깊이 파헤치는 전략’으로 승화할 수 있다.
마지막 장면
며칠 전, 재훈이 또다시 “야근”이라며 문자를 보냈다. 나는 집 앞 편의점에서 맥주 두 캔을 샀다. 문 앞에 녹음 파일 하나를 놓고 갔다. 안에는 전날 밤 그가 친구들과 나눈 대화가 담겨 있었다.
‘형, 너네 여친 무서워. 눈빛이…’ ‘그래도 난 걔가 좋아. 갇혀 있는 기분이 들지만, 동시에 너무 자유로워.’
나는 녹음기를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가슴 한쪽이 화끈하게 타는 듯했다.
‘참는다는 것이 단순히 삼키는 게 아니라, 뱉어낼 순간을 계산한다는 뜻이었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나는 궁금해졌다. ‘그 순간이 지금일까, 아니면 또 다른 게임의 서막일까.’
당신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냥 넘어갔는가’. 그리고 그때마다 네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단단해졌다는 걸 느꼈는가?